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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혜민 Oct 12. 2022

누군가에게 첫인상으로 기억되기

#7 산티아고 순례길 이야기 

 대학교 신입생 때 3월 한 달 동안은 선배들이 우리들에게 밥을 사줬다. 지금 생각해보면 한 두 살 정도, 많아 봤자 4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 똑같이 어린 학생들이지만, 그 당시에는 무슨 돈이 있다고 자존심에 밥을 곧잘 사줬던 것 같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선배들은 우리들에게 밥을 사주면서 대학 생활에 대한 이것저것들을 알려주었고 그렇게 신입생들은 대학 문화에 적응해갔다. 그렇게 밥을 얻어먹은 우리들은 선배들에게 밥을 다시 사주는 걸로 고마움을 표시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선배가 되면 똑같이 입학생들에게 밥을 사주는 걸로 순환되었다. 받았던 은혜를 갚는다고 '보은'을 한다고 했다. 대학이라는 새로운 사회에 낯선 우리에게 밥을 사주는 행위는 우리가 이곳에 초대받은 손님이라 여기게 했다. 홀로 서울 생활을 처음 해보게 된 내가 이 낯선 도시와 낯선 대학 문화에 적응을 잘할 수 있었고 나아가 학과 생활을 아주 열심히 할 수 있었던 것도 이 문화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덕분에 나에게 아직까지 대학 생활은 1학년 때 느꼈던 그대로 '친절함'과 '새로움' 정도로 기억된다. 이렇게 처음에 누군가에게 환대받고 있다는 분위기는 나에게 꽤 큰 영향을 끼쳐왔다.


 이는 순례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순례길은커녕 유럽 대륙에 적응하지 못한 채로 걷고 있던 나에게 다양한 모양으로 환영해준 사람들이 크게 기억에 남는다. 내가 산티아고까지 힘을 내서 걸을 수 있었던 것도 그들이 주었던 환영해준 힘이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선배들이 신입생들에게 밥을 사주고 우리를 맞이해준 것과 같이 길을 낯설어하는 아시아인을 따뜻하게 맞이해줌으로써 나는 이 길에 애정을 가지게 되었다. 지금도 처음 느꼈던 그대로 순례길을 기억하고 있다. 우리가 밥을 얻어먹고 그 밥을 신입생들에게 다시 사줬던 것처럼 이곳에서도 내가 누군가 덕분에 잘 적응하고 좋은 인상을 가지고 걷고 있는 거라면 문득 나도 이제 '보은'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꼭 그럴 필요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러고 싶었다. 내가 받았던 환대를 보답하고자 하는 일종의 의무감이었던 걸지도 모른다.







 용서의 언덕을 건너면서 신기한 인연을 만났다. 언덕에서 쉬고 있던 중이었는데 금발머리 외국인이 한국어로 "안녕하세요"라며 인사를 거는 거였다. 그는 살짝 당황한 나에게 자신을 한국 광양시에서 원어민 강사로 일했던 미국인 '피터'라고 소개했다. 짧은 대화 후 우리는 헤어졌고, 다음 마을인 푸엔테 라 레이나에서 성당을 찾아가는 중에 우연히 다시 만났다. 피터는 시에스타 시간에 혼자 늦은 점심을 하는 중이었는데 어떤 용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먼저 말을 걸어 카페에 함께 앉아 수다를 떨며 지루한 시에스타 시간을 보냈다. 피터는 나보다 한국 문화에 애정이 많아 보였다. 테라는 맛이 없다며 카스와 참이슬로 만든 1:1 비율의 소맥을 찬양하고 삼겹살이 그리워하는 '대한 미국인'과 친해지는 것은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오늘은 한식을 그리워하는 미국인이 순례를 시작한 지 첫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마침 가지고 있는 라면이 있어 같은 마을에 머물었던 한국인 순례자들을 소개해주면서 저녁을 함께 했다. 


 앞서 말했듯이 프랑스 길의 시작점이 생장 피에 드 포흐이긴 하지만 다양한 순례자들이 본인의 일정과 상황에 따라 시작 지점이나 도착지점을 바꾸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는 익숙한 15일째가 누군가에게는 첫 째날의 설렘을 가진 날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 날 이후로부터 나는 산티아고를 향하는 길에서 항상 내가 만나는 누군가의 첫인상이 내가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적당히 긍정적인 부담감을 안으며 걸었다. 선배들에게 얻어먹었던 밥을 후배들에게 사주는 선배가 된 것처럼 말이다. 


 피터와는 그 이후로도 몇 번 마주쳤는데 신기하게 이틀째 이후부터는 일정이 닿지 않았는지 한 번도 마주치지 못했다. 그렇게 나는 산티아고에 도착했고 도착한 다음 날 아침에 순례자 미사를 참석하기 위해 산티아고 광장으로 가고 있는 중이었다. 갑자기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피터가 설레는 표정으로 산티아고에 들어오고 있었다. 대략 3주 만에 보는 거라 반가워져 얘기를 나누다가 피터가 감정이 북받쳤는지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 왜 벌써 울컥하는 거야? 아직 대성당 도착 안 했어! "

" 혜민, 너는 내가 순례길에서 처음 만났던 사람인데, 대성당에 도착하기 전에 본 마지막 친구야 "

" 이거 좀 감동인데? "

" 그리고 첫 째날 네가 나한테 말을 걸어줬잖아. 그때 사실 뭘 할지 몰랐거든. 덕분에 순례길을 더 즐겁게 걸을 수 있었던 것 같아. 나 은근 소심했거든. 고마워"

"... "

" 좋은 사람들은 많이 만났지? "

" 덕분에 "


 짧았던 대답을 마지막으로 말없이 대성당까지 함께 걸어가 기쁨을 나눴다. 기분 좋은 뿌듯함을 느꼈다. '역시 나의 가치는 틀리지 않았어'하는 정도의 뿌듯함이었다. 나는 이 여정 동안 고마운 사람들을 늘 생각하며 걸었다. 그래서 산티아고에 도착하면 꼭 그들을 다시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한편으로는 반대로 누군가도 나를 산티아고에서 만나고 싶어 했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있었는데 이런 자그마한 소망이 이뤄진 것 같았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는 관대하지 못하고 내가 했던 행동이 누군가에게 얼마큼의 크기로 다가갈지 가늠을 하지 못한다.


 숙소에서 조식을 만들다가 계란이 남아서 옆에 있던 순례자분께 주고 떠났는데 길을 걸으면서 다시 만난 적이 있었다. 죄송스럽게도 나는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했지만 그 아저씨는 'Korean Egg girl'이라는 아주 단순한 별명으로 날 부르며 너무 반가워했고 고마웠다며 커피를 사주셨다. 다른 날에는 마을에 도착해서 힘들어 쉬고 있을 때 함께 쉬던 순례자가 반을 쪼개서 나눠준 오렌지는 그날 하루 종일의 몸과 마음을 보충시켜줬다. 또 다른 날에는 알베르게에서 요리를 하는 중이었다. 옆에서 스페인 할아버지가 죽을 끓이고 있길래 아는 스페인어 단어 몇 개로 건강 조심하라는 염려 섞인 말을 건네면서 짧디 짧은 대화를 나눴다. 그러고 다음 날, 숙소를 예약하지 않고 천천히 걸은 탓에 좋은 알베르게에 방이 없다는 대답을 듣고 망연자실하고 있던 중에 그 할아버지들이 구세군처럼 나타나 예약을 도와주기도 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런 적들이 많았다. 


 이렇게 나의 자그마한 호의는 눈덩이마냥 굴러서 나에게 다시 다가왔다. 누군가의 시작에 내가 긍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주어서 행복한 시작을 하는 것. 그렇게 굴려진 눈덩이들이 생겨나면서 자연스레 이타적인 분위기가 형성되는 것. 이렇게 나로 인해서 이 길이 조금 더 아름다워질 수 있다면 충분히, 기꺼이 친절하게 이타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다. 순례길은 한 달이라는 시간에 끝이 난다. 그렇기에 내가 했던 행동들의 반응을 빠른 시간 내에 확인할 수 있었지만 일상에서는 이런 점들이 쉽게 보이지 않을 수 있다. 우리는 한 달보다 더 오랜 시간 살아갈 테니 말이다. 일상에서 호흡은 더 길어지고 활력은 조금 더 낮아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자신의 호의로 무언가를 시작하는 초심자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내가 사는 세상이 좀 더 의미 있어지고 따뜻해진다면 나의 호의는 더 이상 사소하지 않게 여길 것이다. 여행에서 느끼는 이러한 이타적인 마음이 일상에서도 더 많아진다면 우리의 삶이 더 따뜻하게 호흡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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