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산티아고 순례길 이야기
사람들의 여행 스타일은 제각각이다. 한 도시에서 한 달 남짓되는 시간 동안 여행하는 방식은 젊은 여행자들 사이에서 '한 달 살기'라는 이름으로 유명하다. 이렇게 질릴 때까지 한 도시를 현지인처럼 느끼려는 여행객들이 있는 반면에 질리기 전에 다른 여행지나 현실로 떠나고자 하는 여행객들도 있다. 순례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두 달에 걸쳐서 아주 천천히 풍경을 즐기고 마을마다 가지는 역사를 알아가면서 천천히 걷는 순례자가 있는 반면에 거의 달리다시피 앞만 보고 걸어 2주 만에 산티아고에 도착하는 순례자들도 있다.
나는 떠나기 싫을 때 떠나야 하는 여행자였다. 영화 김종욱 찾기를 보면 지우(임수정)는 과자를 먹을 때 항상 마지막 과자를 남긴다. 그러면서 본인은 뭐든지 결말을 보지 않고 마지막을 남겨두어야 한다고 말하는데 아마 같은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어떤 여행에서든지 정말 행복하다고 생각할 때 그곳을 떠나야 가장 행복한 경험으로 기억된다 생각했으니까. 소위 말해 박수 칠 때 항상 떠나고자 했던 것이다. 그래서 순례길에서도 미련을 두고서라도 쉬지 않고 걸어가는 순례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순례길에서는 상황에 따라 연박을 하며 휴식을 취하기도, 관광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럴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순례를 시작하고 처음 나오는 대도시인 팜플로냐를 도착하기 전에 마주쳤던 여러 순례자들이 팜플로냐에서 하루 쉴 거냐고 질문했을 때도 '나는 그럴 일이 없을 거다'라는 대답으로 응해왔다.
게다가 팜플로냐에서의 첫 째날은 정말이지 행복했다. 그만큼 행복하고 완벽했던 하루였기에 이 기억을 남겨둔 채 나는 떠나야 했다. 하지만 다음 날 일찍 일어나서도 이상하리만큼 게으름을 피우고 싶었고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다 보니 출발해야 할 시간을 훌쩍 넘기고 있었다. 머리로는 빨리 출발하라고 외치고 있었지만 모든 우주의 중력이 나에게만 오는지 몸은 천근만근이었다. 잠깐 쉬고갈까하며 고민하면서도 전 날 함께 걸었던 사람들은 다음 마을로 출발했을텐데, 아는 사람도 없는 이 곳에서 홀로 외로움을 느끼고 싶지도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하나 줄다리기를 하다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에이 나도 모르겠다'정도의 다짐으로 하루를 쉬어가야겠다 결정했던 것 같다. 다양한 시도를 해보고 실패해도 손해보지 않을 만큼의 충분한 시간이 있는 덕분이다.
그렇게 긴 하루를 어떻게 보낼까 고민하면서 조식을 먹던 중에 순례자는 아니지만 팜플로냐에 잠시 친구를 만나러 온 중년의 인도인 남성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 그분이 요가 강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도인 요가강사라니! 인도에서 직접 공수해온 요가매트까지 가지고 있는 걸 보니 예사롭지 않음은 금세 알 수 있었다. 그날도 요가를 할 공원을 찾고 있다는 말에 덥석 ‘나도 함께 요가하고 싶다!’고 외쳤다.
그렇게 같이 공원에서 요가를 하면서 '요가의 원조는 이렇구나'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기도, 팜플로냐 역사를 들으며 현지인이 추천해준 타파스를 먹으며 시간도 보냈다. 헤어질 때쯤이 되어서는 모두에게 '솔직히 나는 어제 너무 행복했어서 이 도시에서 오늘 떠나려 했는데 더 행복한 경험을 나눠주어 고맙다'라고 고백하자, '우리가 아니라 너의 용기 덕분이야'라는 대답을 받았다. (은근히 이런 고백들은 모국어로는 이렇게 말 하기가 어색해서 그런 듯 한지, 영어로 말하면 더 솔직하게 전할 수 있는 것 같다.)
이렇게 다음 날을 보내고 나서야 왜 이곳을 그토록 떠나기 싫었는지 알 것 같았다. 이 도시는 나에게 보여주고 알려줄 것들이 아직 남아있는데 나는 떠나려고 하니 마음속 우수리가 남았던 것이다. 항상 모든 상황이 내가 해왔던 경험들이 알려준 대로 흘러가진 않는다. 경험으로 만들어 낸 일종의 빅데이터는 참고용이지 앞으로 내가 갈 길을 정하는 나침반이 아닌 것이다. 내가 당연하게 여겨왔던 것들을 당연하지 않게 생각해보려는 아주 작은 용기를 가지면 새로운 것들을 만날 수 있다. 그러자 스페인의 소도시인 팜플로냐에서 인도인 요가강사와 함께 요가를 하는 진귀한 경험을 채워나갈 수 있었다.
여행은 한 권의 책을 만드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나의 순례길 이야기를 담은 책에서 [팜플로냐] 챕터는 독일인 친구들 덕분에 신나고 색다른 이야기로 가득 채워졌었다. 그러고 나서 다음 장을 넘겨 새로운 이야기들을 만들어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 백지를 내가 스스로 완벽하게 채울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음 챕터로 넘어가고 싶었다. 늘 그래 왔었다. 하지만 백지로 둘지 언정 다음 장으로 넘겨보는 게 어떨까? 백지여도 충분히 존재의 이유를 가지니까 말이다. 아니면 '내가 지금껏 안 해본 용기를 내봤지만 별거 없었음. 실패'라고 적을 수 있는 경험이라도 남겨보는 것이다. 믿어보시라. 스페인에서 인도인 요가강사와 함께 요가를 할 확률은 100%이다. 다만 조건이 있다. 기존에 내가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에서 벗어나 보는 것이다. 돌아오는 포상에 비해 아주 쉬운 조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