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산티아고 순례길 이야기
죽기 살기로 피레네 산맥을 넘어 도착한 론세스바예스는 먼저 도착한 순례자들로 바글바글했다. 길에서 마주쳤던 순례자들도 대부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만남의 광장처럼 모두가 이렇게 다시 만날 수 있는 건 순례길에서 첫 째날에만 누릴 수 있는 특별한 광경이다.
론세스바예스에는 수도원에서 규모가 큰 알베르게를 운영하는데, 이 마을에서 알베르게는 이곳 하나뿐이다. 피레네 산맥을 넘은 순례자들은 충분히 지쳐있기에 대부분은 사막의 오아시스같이 등장한 이 알베르게에서 쉬는 것을 택한다. 이렇게 이 마을이 피레네 산맥을 넘어온 순례자들의 만남의 광장이 된 것이다. 이처럼 첫날에는 론세스바예스라는 공동의 목적지가 존재하기 때문에 길에서 만났던 순례자들을 다시 만날 수 있었지만 이제부터는 아니다.
순례자 사무소에서는 산티아고까지 적당한 거리를(평균 25km 정도) 나누어 총 35일 동안의 일반적인 하루 일정을 추천해준다. 대부분의 순례자들이 그 일정을 따라가곤 하는데, 가는 길에는 수많은 마을들이 있고 각자의 상황에 따라 더 쉬어가기도, 더 걸어가기도 하므로 모두가 이 방식에 맞추어서 걷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나의 선택에 맡겨지는 것이다. 나의 선택으로 누군가와는 동행이 될 수 있지만 누군가와는 영영 만나지 못할 수 있다. 진정한 어른은 본인의 선택에 책임을 지는 것이라는데, 그렇다고 이렇게 매일마다 내 선택의 결과를 느껴야 한다니, 부담스러웠고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나는 이 순례길의 법칙에 따라야 하는 순례자이므로 스스로 내린 선택의 결과를 받아들이는데 점차 익숙해져야만 했다.
'언젠가는 나도 알게 되겠지 이 길이 곧 나에게 가르쳐줄 테니까.'
김동률의 '출발'에는 이런 가사가 나온다. 나도 길을 믿고 걷다 보니, 이 길이 나에게 - 항상 선택에 어려움을 겪고 자주 미련으로 뒤돌아봐왔던- 내가 해온 모든 선택이 최선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여정을 만들어주었다.
나중 말고 지금. 지금 현재
순례길을 걷는 초반에는 대부분의 순례자들이 이 길 자체를 어색해하고 서로 낯을 가리곤 한다. 나도 낯을 은근히 가리는 성격이라 초면에는 말을 아끼곤 했는데 순례길에서는 그렇게 해서는 인연을 놓치게 될 수도 있다. 첫 째날, 함께 저녁을 먹었던(이제는 이름도 기억이 나지 않는) 프랑스인과 서로 얘기를 더 나누고 싶었지만 다들 내일을 위해 숙소로 돌아가는 분위기였다. 나도 '내일 만나면 더 얘기해야겠다'라는 생각으로 휴식을 취하러 갔고, 예상했겠지만 그 프랑스인과는 그 이후로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피레네 산맥을 처음 같이 넘었던 옌과도 다음 날엔 서로 다른 마을에 머물러 만나지 못했다. 자주 마주쳐서 '우리는 늘 그랬듯이 우연히 또 만날 거야'라며 다음을 기약했던 카탈리나와도 그 말을 한 이후로는 영영 만나지 못했다.
이들이 기억에 남는 이유는 아쉬움이다. 전하고 싶은 말은 생각만 한 채 전해주지 못했고 다음에 만날 거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연락처 같은 수단도 떠올리지도 못했기에 아쉬운 것이다. 초반에는 이 기나긴 여정에서 당연히 한 번은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다음을 기약했지만, 다음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 모두는 다리 길이가 다르다. 걷는 속도도 다르며 체력도, 상황도 다르다. 그렇기에 이 다른 상황 속에서 정말 우연적으로 마주치게 되는 그 순간, 선물 같은 그 순간을 후회 없이 임한다면 아쉬움이 더 이상 부정적이지만은 않을 것이다. 이렇게 현재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면서부터, 내 선택으로 만들어진 결과를 더 이상 걱정과 두려움이 아니라 기대되는 내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아빠를 이렇게나 그리워했던 그 근원적인 이유가 그 당시, 그 순간에 나의 감정과 행동을 다음으로 미뤄왔다는 점에 기인했다고 깨닫는다. 전하지 못한 아쉬움이 미안함으로, 미안함이 후회와 슬픔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이제야 법륜 스님이 슬픔에 눈을 가려 현재 내 주위 사람들을 놓치지 말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