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낭만제주]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힘
성산을 거쳐 이번 여행의 마지막 장소인 구좌읍에 위치한 ‘세화리’로 오게 되었다. 여기를 이번 여행의 마지막 장소로 정한 이유는 한적한 마을 안의 독채 민박에서 온전히 우리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기에, 남아있는 여독을 풀기에도 적당하고, '우리'에 집중하여 이번 여행을 정리하기 위함이었다.
우리가 머문 독채 민박은 주인 분께서 거주하고 계신 집 앞마당에 손수 지으신 나무로 된 직사각형의 작은 집이었다. 주위가 온통 푸른 밭으로 둘러싸여 있고, 덕분에 문을 열어놓기만 하면 자연의 소리 - 바람소리, 새소리, 시간에 따라 날씨가 변하는 소리, 재잘거림 - 에 흠뻑 취할 수 있었다. 자연의 소리를 자장가 삼아 그늘 아래서 책을 읽다 나도 모르게 잠들곤 했다.
도착하자마자 한 숨 잔 뒤, 창 밖으로 보이는 동네를 여기저기 구경하기 시작했다. 내 시선을 사로잡는 맞은편 건물이 하나 있었는데, 마을의 오래된 느낌과는 사뭇 달라 보였다. 저곳의 정체는 무엇일까 하여 호기심 가득한 마음으로 들르니, 독서카페와 레스토랑을 같이 운영하는 곳이라고 한다. 안 그래도 허기진 상태에 뭐라도 좀 먹어야 했는데, 적당한 가격에 맥주 한 잔과 이 집에서 가장 잘 팔리는 비빔밥을 먹고 나니 이제야 좀 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여행 6일 차에 우연히 맛있는 집을 발견하다니, 여행 전 매체들을 통해 알고 간 맛집을 방문하는 것보다 더욱 짜릿한 느낌이다. 어릴 적 했던 보물 찾기에서 숨겨진 종이를 발견한 기분이랄까.
그러고는 숙소로 돌아와 여느 때와 같이 각자의 시간을 보낸 후 장을 보기 위해 읍내에 있는 마트로 향했다. 늘 버스를 타고 무심결에 지나쳐 온 그 길을 걷고 있자니 현지의 느낌 - 약간의 쌀쌀함, 그리 짜지 않은 바다내음, 시원하게 달리는 차 소리, 아이들의 재잘거림 - 을 온몸으로 흡수하는 기분이 들어, 가는 내내 남편과 함께 흥얼거렸다.
장을 본 뒤 숙소로 돌아와 저녁을 준비하고는 식탁에 앉아 맥주 한 캔을 마시며 제주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창 밖으로 어렴풋이 보이는 당근밭과 노란 조명을 안주삼아 서로가 여행지에서 느낀 생각과 감정들을 마구 쏟아내기 시작했다. 각자의 감정에 충실한 채, 돌아가서는 좀 더 행복하고 덜 힘들게 살자고 다짐했다.
혼자 하는 여행의 밤은 무척 쓸쓸했는데, 내 편과 함께하는 여행의 밤은 마음이 더욱 따뜻해지는 느낌이랄까.
기분 좋은 햇살과 재잘거리는 새소리에 일어나 남편과 함께 동네 한 바퀴를 걷은 뒤, 남편을 먼저 보내고 화창한 당근밭의 모습에 흠뻑 취해 연신 셔터를 눌러댔다. 그 날 아침의 바람과 빛에 더욱 푸르던 당근밭의 느낌을 절대 잊을 수 없다. 아 당근밭, 거무스름한 토양을 뚫고 힘차게 나오는 푸른빛의 이파리를 보고 있자니 내 몸 전체가 싱그러움으로 가득 찬 기분이었다. 나중에 제주에 살아야겠다는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잠깐의 사색을 즐긴 후 숙소로 돌아와 나갈 채비를 한 뒤 어제 들렀던 집 근처의 독서카페로 향했다. 어제 먹어보기로 결심했던 해산물 샐러드와 캐러멜 시럽이 듬뿍 담긴 밀크티를 주문했는데, 아직도 그 밀크티의 달콤 쌉싸름한 맛을 잊을 수가 없다.
“배낭여행 중이신가 봐요.”
주인 분께서 건넨 대화에 잠시나마 첫 제주여행의 추억을 공유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대화는 오름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 분과 내가 처음 경험했던 오름이 제주에서는 그리 유명하지 않은 곳임에 마치 오래된 첫사랑을 아는 누군가를 만난 것 같은 느낌에 행복했다.
내 마음속 한 곳, 오래전 아름다운 추억을 상기시켜준 그곳에서의 좋은 느낌과 함께 무거운 배낭을 메고 남편과 함께 읍내까지 걸었고 나 혼자 오래전 여행의 기억의 설렘에 키득거리기도 하고 사색에 잠기기도 했다.
공항으로 가기 위해 동일주 노선에 몸을 실었다. 들떠있는 나의 감정과 창밖에 펼쳐지는 맑은 에메랄드 빛 바다가 한데 어우러져 가는 내내 마음이 일렁였고, 그렇게 나의 여행은 또 하나의 반짝이는 보석이 되어 내 맘속에 자리 잡는다. 나의 여행이 끝나가고 있다.
눈 시리게 아름다운 제주의 모습, 6박 7일의 여행 중 가장 화창한 날, 동쪽 바다의 아름다움을 끝으로 나의 여행을 마친다. 안녕, 나의 제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