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나시와 라시
인도 루트 중에 여행자들이 꼭 들르는 도시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라나시이다. 가이드북에서 바라나시를 소개할 때 항상 시작하는 진부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말.'바라나시를 보지 않았다면 인도를 본 것이 아니다.'라는 말과 마크 트웨인이 말했다는 '역사보다, 전통보다, 전설보다 오래된 도시'라는 말은 바라나시를 방문한 사람이라면 다들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첫 인도 여행을 다녀온 지 벌써 13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바라나시는 그대로인걸 보면 여행자들의 니즈를 충족시키기 위해 일부러 개발하지 않는다는 말이 어느 정도 맞는 말일 수도 있겠다 싶다. 그 정도로 전설보다 오래된 도시의 느낌을 품고 있다.
여행자들 사이에서 왕왕 도는 말로는 '바라나시에서 길을 잃으면 무조건 가트 쪽으로 나오라는 말이 있다.'
처음 바라나시에 갔을 때는 정말 메이즈 러너에 나오는 미로보다 복잡한 느낌이었다. 메이즈 러너에서는 생명을 위협하는 괴물이 튀어나와 죽여주기라도 하지. 여기선 길을 잃으면 햇빛에 말라죽어가는 미라가 될 때까지 헤매는 고통을 느껴야 한다. 메이즈 러너보다 좁고 더럽고 복잡한 미로 길로 잘못 빠져 한참을 헤매다가 겨우 숙소로 돌아왔을 땐 열사병으로 기어이 앓아누웠다. 지금은 gps가 잘 되어 있어 헤맬 일이 없지만, 그때는 종이 지도가 무용지물이었다. 여행자들 사이에 도는 말처럼 헤맨다 싶으면 무조건 가트가 있는 방향으로 머리를 돌리는 것이 좋다. 안 그러면 나처럼 내 정수리만 돋보기로 집중적으로 지지는 듯한 햇빛 아래서 타 죽어가는 수가 있다. 나는 심한 길치라 세 번째 방문했을 때야 비로소 라씨집을 헤매지 않고 내 집 가듯 찾을 갈 수 있었다.
아그라의 타지마할보다 유명하며 세계의 모든 여행자들이 몰려드는 바라나시에서는 사실 딱히 할 게 없다.
그래서 하루 일과는 너무 단순하다. 느지막이 일어나 아침 먹고 라씨 먹고, 좀 쉬다가 점심 먹고 라씨 먹고 낮잠 자고, 해질때즘돼서 저녁 먹고 라씨 먹고 맥주를 마시고 자는.. 그런 라씨와 함께하는 백수 같은 하루.
딱히 할 일이 없어서인지 라씨가 유난히 맛있어서 인지 모르겠지만 다들 유난히 라씨 중독 증세를 보인다.
(심지어 나는 인도 여행 중에 라씨를 그리 많이 마시지 않는 편이었다. 예민한 내 장을 위해)
한국인들끼리 만나면 라씨 얘기는 빠지지 않는다. 항상 얘기의 시작은 라씨계의 양대산맥 블루 라씨냐 씨원라씨냐이다. 굳이 따지자면 블루 라씨는 오래되고 라씨 가게의 원조이며 마니아도 많은 메이 저격이고, (블루 라씨 주인의 준수한 얼굴도 단단히 한 몫하고 있다. 다만 블루 라씨는 마약이 든 방 라씨를 판매하며, 여성들을 성추행했다는 안 좋은 소문이 있다.) 씨원 라씨는 이제 막 시작해 새로운 라씨계의 블루칩으로 떠오르고 있는 아직은 마이너 격인 가게이다. 문제는 라씨 마니아들이 좀 광적이라는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시큼한 맛이 강한 블루 라씨 쪽보다는 얼음도 들어가고 분유 맛이 나는 씨원 라씨를 선호했는데, 씨원라씨가 맛있다고 말을 하면 블루 라씨 마니아들은 격앙하기 시작한다. 그럼 씨원 라씨 쪽도 덩달아 흥분하는 분위기로 바뀐다. 그 가게의 주인들도 아니면서 서로 흥분하고 섭섭해하던 그 모습들이 지금도 생각하면 너무 웃기다. 정말 할 게 없는 도시니까 가능한 해프닝이다. 아무튼 모든 여행자들이 바라나시에서 라씨에 열광하는 것만은 사실이다.
바라나시에서 라씨를 마시는 건 중요한 하루의 일과이며, 의식과 같은 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