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이 바뀔 때마다 아름다운 가게에 간다.

by 따듯한 바람

어느덧 갱년기에 대한 글을 쓸 만큼 나이가 들었다.

지금까지 입고 살아온 옷들을 버리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몇 해 전 이사를 하면서 물건을 정말 많이 정리했다. 결혼할 때 산 가구도, 아이와의 추억이 담긴 물건들도. 아이가 만들어온 작품들을 버릴 땐 마음이 오래 머물렀다. 아이의 냄새가 밴 옷들도 그랬다. 하지만 커가는 아이의 몸에 맞는 옷을 입히려면 옷장을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입지 않는 옷들을 보관하기 위해 수납용품이나 가구를 더 사는 건 의미 없었다. 초등학교에서 중학교,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넘어갈 때마다 한 번씩 큰 정리를 했다. 그러면서 내 옷들도 함께 정리했다.


아이 옷이 너무 아까워서 시작한 것이 ‘아름다운 가게’ 기부였다. 처음부터 기부한 건 아니다. 처음에는 당근마켓에 팔기도 했다. 아이의 옷들은 올리는 족족 팔렸고, 책상과 책장, 자전거까지 금방 팔렸다. 정리가 목적이었기 때문에 저렴하게 올렸고, 누군가 가져가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전집도 중고서점에 싸게 넘겼다. 그러다 한 번, 당근에 올린 바이올린을 두고 메시지가 길어지면서 피곤함을 느꼈다. 문의가 많아지자 감당이 어려워졌고, 옷은 그냥 의류수거함에 넣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비싼 패딩을 정리하면서 지나가던 ‘아름다운 가게’가 떠올랐다. 아이가 어릴 때 굿네이버스 후원을 시작했던 기억이 났고, 기부도 아이 이름으로 시작해 보자고 마음먹었다. 좋은 옷만 골라서 직접 아이와 함께 기부했다. 그 뒤로 계절이 바뀔 때마다 아름다운 가게에 들렀다.


작년 가을과 겨울에도 많은 옷을 기부했다. 아는 분이 옷이 많아 정리하기 어렵다고 답답하다고 해서 기부를 이야기했지만 선뜻 하기는 어려워하셔서 농담 삼아 "제게 버리세요“ 했었다. 그랬더니 정말 좋지만 안 입는 옷들을 골라서 보내주셨다. 정말 좋은 옷들이었다. 나는 그 옷들을 정성껏 정리해 아름다운 가게에 기부했다. 혹시나 서운하실까 싶어, 내가 가지고 있던 모직 체크 스커트 사진과 함께 그 옷들도 함께 기부한다고 말씀드렸다. 내게도 비싼 옷이 있었지만, 결국은 다 보내기로 했다.


계절마다 옷을 정리하고 기부하거나 수거함에 넣는 이유는 단 하나다. 가볍게 살고 싶어서다. 어느 해엔가 계절이 바뀌었는데도 정리를 못 해 옷장에 지난 계절의 옷들이 그대로 걸려 있었던 적이 있다. 그때 문득 ‘내가 갑자기 아프기라도 하면 이 옷들은 누가 어떻게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많은 것들이 부담스러워졌다.


그래서 시작했다. 지금 입고 싶은 옷, 편하고 간결한 옷만 남기자고. 젊은 시절 비싸게 산 옷들은 샀을 땐 아까워 넣어두고, 결국 몇 년 후 아름다운 가게로 보내졌다. 이젠 정리하고 남길 옷을 고를 때 ‘이 옷을 비싸게 주고 샀던가’보다 ‘내가 입는가, 입고 싶은가’를 기준으로 삼는다. 내가 그렇게 정리하는 걸 본 남편도 자기 옷을 조금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몇 주 전엔 큰맘 먹고 오래된 겨울 양복을 버렸다. 이태리 모직에 조끼까지 갖춘 맞춤 양복, 결혼할 때 산 니나리치 양복까지. 아무리 좋은 옷이어도 요즘 스타일이 아니라며 과감히 버렸다. 이불도 정리했다. 손님도 자고 가지 않는 이불들을 굳이 보관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정리하다 보니 결국 남는 옷은 천이 좋고, 촉감이 부드러우며,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옷들뿐이었다. 누가 보기엔 평범한 옷일지 몰라도, 내가 입었을 때 편하고 기분 좋아지는 옷들. 단정한 단색 계열의 옷들이다. 이제는 옷을 하나 살 때도 신중해진다. 지금 가진 옷과 겹치지는 않는지, 새 옷을 들이면 어떤 옷을 내보낼지 고민한다.


이렇게 옷 정리 이야기를 적다가 보니, 옷은 이렇게 잘 정리하는데, 수십 년 된 마음은 정리하지 못하고 갖고 있는 게 생각났다. 가정의 달 5월이 되면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떠오른다. 그럴 때마다 한 번씩 오래된 감정들이 떠오르고, 그 정리하지 못한 마음들은 현재의 관계들에서 오고 가기도 한다. 그럴 때 생각했었다. 왜 아직도 이 마음을 갖고 있을까?


정리하지 못한 오래된 마음들도 이제는 훌훌 가볍게 보내주어야겠다.


' 잘 가라 내 오래된 마음들아.'


케케 묶은 마음들이 하나씩 떠오를 때마다 말해줘야겠다.


' 고생 많았어, 고마웠어. 그리고 너무 오래 붙잡고 있어서 힘들기도 하고 마음속에서 푹푹 냄새가 나기도 했어. 이제는 홀가분하게 보내줄게. 날마다 새로운 마음으로 홀가분하게 간결하게 살아보고 싶어.

입으면 기분 좋은 옷을 남기듯, 생각할수록 좋은 마음을 기억하고 싶어.

그리고 좋은 마음을 나누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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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지난 토요일에 발행한 '공짜는 없다'는 '오늘 마음을 생각하다' 브런치북에 어울리는 글인데 토요일 연재 시간을 지키고 싶어서 '하루 하나 글쓰기를 약속하다'에 올렸어요. 올리고 나서 다시 브런치 북을 바꾸면 좋아해요 해주신 흔적이 사라져서 그냥 두고, 새로운 글을 하나 지난밤에 썼어요. 어젯밤에 하나의 글을 쓰고 나니, 이 글이 이 브런치 북에 더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어 이렇게 올립니다. 연재일은 토요일이 맞습니다. 오늘은 번외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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