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번부터~21년 7월 11일까지
실존 인물과 무관한 내용입니다.
글러가 실력을 숨김(@amazing_010)봇의 매일 짧은 글의 문장은 볼드 처리 했습니다.
피부와 피부가 맞닿았다. 끈적이는 습기가 살갗이 닿아 생기는 온도와, '쩍'하고 들러붙는 소리로 와 닿았다. 나는 몸을 움츠렸다. 당당하게 보이고 싶은 마음은 같이 접었다.
내 마음을 고스란히 보내는 데 드는 비용은 무료였다. 하지만 받는 사람에게는 애를 쓰는 데 비용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무료로 줄 수 있는 것이 있었으나, 받는 사람이 생각 없다는 점에서 적선이나 기부, 아니면 구걸같았다.
그래서 애를 썼던 것 같다. 매일같이 내 이야기를 들어 달라고 찾아갔다. 꽃이 피고 지더라도, 낙엽이 지고 눈이 내리더라도 내 부탁은 계속됐다. 그러다 그를 따라간 곳은 한 겨울의 어느 도시였다. 그곳에서 겨울은 좀처럼 지나갈 기색이 없었다. 문 앞에서 그를 기다리며, 내 마음을 구걸하며, 나는 한없이 생각했다. 이 밤에 내가 그에게 마음을 받아달라고 구걸하고 있는 것은 한겨울밤의 열병일 뿐이라고 말이다.
그러다 어느날 문이 열렸다. 동이 트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는 나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나 역시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는 금방이라도 악수를 하며 나를 집으로 초대할 것 같던 태도를 거두었다. 표정이 매서워진 것도 한순간이었다.
"그대의 왼쪽과 오른쪽을 바꿉시다. 교환하는 겁니다. 나에게 왼손을 내미세요."
나는 그의 말을 멋대로 해석했다. 오른손과 오른손이 마주잡으면 악수가 된다. 그러면 우리는 동등하게 마주설 수 있다. 반면 오른손과 왼손의 위치가 바뀌면, 우리의 관계도 달라질 수 있다. 오른손과 완손은 마주잡아 나란히 걸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이런 것을 희망하던 때만 해도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이 도시에 겨울만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래서 그의 집에 딀어가지 않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죽어버릴 거라는 것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 순간은 그냥 아무것도 모른 채 맞는,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나는 그래서 그 계절이 나에게 아름다운 순간을 선사한 때라고밖에 생각하지 않았었다.
나는 예상했던 것처럼 그의 손을 마주잡고 들어갔다.
"행복해지고 싶어요."
누구와 함께 행복해지고 싶은지는 말하지 않았다. 그냥 그를 보며 말했다.
"행복해지고 싶어."
다시 말했다.
나는 그의 입에서 "나 역시 똑같은 것을 생각했소."는 말이 나오기를 바랐다. 맞잡은 손을 보며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당신과 같이 행복해질 수 있다면 더 좋을 것 같아요." 나름의 용기였다. 아무것도 몰라서 할 수 있는 말이기도 했다.
그러자 그는 맞잡았던 손에 힘을 풀었다. 나는 그럴수록 그의 손을 잡았다. 한 손으로 잡고 있던 것은 어느새 두 손이 되었고, 나는 이제 그를 붙잡고 애원하는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나를 잡지 않았다. 붙잡은 손에는 힘이 없었다. 그의 손은 그저 나에게 부드러운 나무토막일 뿐이었다. 나는 부드러운 나무토막을 만지는 것 같았다.
"그대는 참 나와 다르구려."
그는 내 손을 살며시 뿌리치며 말했다.
"무엇이 다르다는 건가요?"
나는 되물었다.
그는 별 말 없이 나에게 접시 하나를 내밀었다.
"내 방식으로 만든 것인데, 한번 들어보시오."
나는 갑자기 매정하게 돌아서는 가 싶더니, 어느새 국 한 그릇을 내어 오는 그를 멀뚱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숟가락을 내쪽으로 돌려 주며 말했다.
"일단 들었으면 하는데."
나는 그가 담아준 국 그릇을 숟가락으로 헤쳐보았다. 마치 바다가 갈라지듯, 걸쭉한 국은 한 줄의 선을 그리며 갈라지고 있었다. 얼마나 오랜 시간 끓였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이것만 들고 나가시오."
그가 말했다.
"예? 어째서요?"
나는 물었다. 묻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에게 우기는 것보다는 묻는 것이 더 잘 통할 것 같아서였다.
"그쪽과 나는 껍질과 껍데기만큼이나 값이 차이가 나요."
나는 어느 쪽이 껍데기인지 물었다. 물으면서도 생각했다. 내가 그에게 껍데기이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그는 오히려 내 예상과 달리 답했다.
"내 쪽이 껍데기이니까."
그의 말은 담담했다. 그래서 더 그럴 듯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쉽게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자리에 앉았다가 가볍게 일어난다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크게 숨을 내쉬어 촛불을 불어 껐다. 테이블 위에 있던 세 개의 촛불 중에서 하나가 꺼졌다.
"그런 말씀을 하실 거면 그만 하세요. 앞으로 그런 말씀을 하실 때마다 하나씩 끌까 합니다."
그 순간의 나는 시끄럽게 터지는 폭죽이나 다름 없었다. 멋대로 소리를 지르는가 하면, 불을 껐다 켜기도 하고, 안절부절하지 못해 숟가락으로 사기 그릇을 살짝씩 내리치는데서 내는 소리가 꼭 폭죽 같았다. 그런 내가 경망스럽다고 하더라도 달리 변명할 여지는 없었다.
"그대는 언제나 나에게 대안에 불과했으니, 이게 그만 하시오."
나에게 A보다는 B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는 나의 경망스럽고 철없는 행동을 보더니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돌려 말하는 데 익숙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으나, 이렇게까지 나를 B로 만들어버릴 줄은 ㅁ졸랐다. 차라리 이름이라도 있는 또 다른 상대가 있으면 좋으련만, 그는 언제가 고고한 모습을 유지하면서 나에게 이름 없는, 그러나 대안이자 차선인, 아니, 어쩌면 차악일지도 모르는 B라고 했다.
그렇게 말을 내던진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에게 밖으로 나가라는 말을 하지는 않았다. 이 순간은 어쩌면 내가 그토록 바랐던 평화였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뒷모습을 내가 본다는 점에서 그랬다. 내가 떠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나를 안정되게 하고 있었다.
*
나의 부모는 누구보다도 선인이었다. 그래서 나를 입양했다는 사실을 전혀 숨기지 않았다. 나는 선인에게 입양이 된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 선인은 두 가지 의미였다. 착한 사람이기도 했지만, 바다에 나가면 절대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기도 했다. 나는 뱃사람인 나의 부모를 하염없이 기다렸다. 그래서 겨울이 되어서도 그를 기다리던 것이 익숙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부모님에게 고마워해야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배부른 생각이 들 때였다.
그가 갑자기 나에게 다가왔다. 가만히 고개를 숙이더니 입을 맞춰왔다. 그러더니 일어나서는 "이제 그만 되었으니 자리를 비켜보시는 게 좋겠소."라고 말했다. 나는 엄동설한의 이 도시에서 어디로 가라는 것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다시 나에게 자신이 잘못 판단했다며, 눈이 그치면 나가라고 했다. 그의 관심과 애정은 꼭 폭식과 절식을 반복하게 하는 느낌을 주었다. 나는 그의 농도 짙은 관심과 더한 무관심 속에서 어떻게 해야할 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어쨌든 내일이 오면 떠나시오."
다시 나에게 짙은 애정을 퍼붇던 그가 말했다. 그의 손은 내 어깨위에 있었고, 눈은 마주하고 있었다. 가까이 닿은 입술은 더 가까워지지 않았다. 거리를 유지한 채였다. 그는 나에게 계속 내일이 되면 떠나라고 했다. 내일이 된다고 창밖의 눈이 그칠리 없었다. 이 도시가 겨울에서 벗어날리도 없었다.
이 절망이 내일이 된다고 해서 끝이 날 리 없었다.
나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화장실로 향했다. 규수들만 쓴다는 값비싼 거울이 앞에 있었다. 나는 그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거울 속의 나는 또 다른 나였다. 나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그와 하룻밤 동침을 하고 나면, 더는 그가 너를 내치지 못할 거라고 말이다. 마치 거울 속의 나는 악마 같았다. 나의 욕망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는 느낌 그 이상이었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생각해볼 수밖에 없었다. 나의 이름은, ......쉽게 기억나지 않았다. 나는 누구지?
나는 거울을 보며 이런저런 말을 걸었다. 너는 누구인지, 나는 누구인지. 왜 그의 곁을 떠나면 안되는지, 그런데 그는 왜 자꾸 곁을 떠나라고 하는지. 갈피를 못 잡게 하는 것들 투성인 곳에서, 그가 말을 걸어왔다.
"그대는 뜻이 깊은 시인이니, 이제 그만 이곳을 떠나시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나는 내가 차고 있는 완장을 보았다. 의용군 대장의 것이었다. 이것을 두고 장군이라고 하기는 커녕, 시인이라는 말이나 하고 있는 것이 이상했다. 이름 난 저항 투사들이 시를 쓴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그것은 모두 내가 이곳에 오기 전의, 그러니까 조국에 있을 때의 이야기이다.
지금의 나는 눈 앞의 '그'를 따라 겨울밖에 없는 이곳에 와있고, 시라고는 볼 줄도 모른다. 듣기만 했을 뿐이었다.
"꼭 지금 나에게 매달리는 것이 사랑을 노래하는 사람 같으니 하는 말이오. 내일이면 떠나시오."
나는 그제서야 어렴풋하게 김명시라는 이름이 기억났다. 언니의 이름인가. 나인가. 나인지, 언니인지. 정체 모를 이름에 나는 김명시라는 여인을 언니로 삼았다. 그가 말하던 것이 몇 구절 떠올랐으나, 그렇다고 시의 구절같지는 않았다.
"혹 김명시라는 여인을 아시오?"
나는 물었다. 그는 웃더니, "꼭 모란 꽃 같은 소리를 하고 있구려."라고 말했다.
"모란 꽃이 어째서요?"
"튤립을 본 적이 있소?"
그는 나에게, 내일이 되어 배를 타고 먼 서양 땅으로 가면 튤립이라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 그곳에서 숨을 크게 들이마셔보라고 했다. 향이 나는지, 나지 않는지. 그러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알 것이라고 했다.
"튤립이라는 꽃에 향이 있는지 없는지 내 알것이 무엇이오?"
나는 되물었다. 지금의 상황, 나는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의용군 완장만이 내 신분을 말해주고 있는데, 나에게 느닷없이 모란꽃이니, 튤립 향기니 내뱉는 그야말로 허영을 자랑하는 이 시대의 시인 같았다.
"그곳에 가면 여름을 맞게 될 것이오. 그때부터 시작되지. 앞으로 우리가 뜨거운 여름을 어떻게 맞을 것인가 말이야."
그는 나에게 갑자기 여름을 이야기했다. 이로써 알 수 있는 것이 하나 잇었다. 튤립이라는 꽃이 피었다가 지고 나면 여름이 될 것이고, 나는 하염없이 문 밖에서 그를 기다리던 겨울과 정 반대인 여름을 맞을 것이라는 사실.
"그때가 되면 시험을 치르게 되겠지. 아마 그 여름은, 조선의 여름을 지낼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일종의 모의 시험이 될 것이오."
조선에 여름이라니. 이곳은 조선이 아니던가. 나는 바깥을 보았다. 눈보라가 치고 있는 저 끝에는 한글로 된 방이 크게 붙어서 너덜거리고 있다. 이런 겨울뿐인 조선에 여름이 올 것이라니. 그리고 내가 떠나 맞게 될 곳이 그 예비 시험장이라니.
"일종의 모의 시험인 셈이오. 모의, 그리고 여름, 시험이니 고사라고 할 수 있겠네."
그의 말은 하나같이 정상적이지 않았다. 허황된 것뿐이었다. 나는 이쯤에서야 내가 왜 그를 따라왔는지 되짚어볼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나는 그를 따르는 것보다 일본으로 향해 일본인 사내와 정을 통하는 것이 사는 데 더 이롭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러다 생각을 바꿨다. 얼마 전, 일본인 사내를 따랐던 여인 하나가 익사했다는 소식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실종 사건이었다. 바닷물을 잔뜩 모아둔 큰 장소에서 사람들은 헤엄을 치고 낭만을 노래하는데, 그곳에서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국의 사람들은 그것을 '수영장 실종 사건' 혹은 '수영장 살인 사건'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그대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내일이 되면 떠나시오."
"일본군이라도 오는 것이오?"
나는 되물었다. 그는 자꾸 떠나라고만 했다. 눈이 오는 마당에서는 나를 따라 온 개 한마리만 뒹굴며 놇고 잇었다.
"조선의 이곳으로도, 일본인이 찾아온다는 말이오?"
나는 하을의 달을 보며 물었다. 저곳까지는 일본인이 따라오지 못하지 않을까. 이제는 내가 그를 왜 따라왔는지도 모르겠고, 그를 사랑하는지도 모르겠지만 하늘로 향한다면 해보다는 지금은 달로 향하는 것이 더 낫겠다 싶었다.
"내가 지켜야 하는 것은 오직 그대 한 사람뿐이라 이리 말하는 것이니, 내일은 떠나시오."
"질리지도 않으십니까? 자꾸 내일 떠나라고 하는데 당초에 연유를 모르니 어찌 떠납니까."
아는 것 하나 없이 떠날 수 없다고 말했다.
"소모적인 논쟁보다는 차라리 잠자리에 드는 것이 낫겠소." '
아까 나를 가까이에 두고 말하던 그는 어느새 멀어져있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우리는 동침을 할리 없다는 것을 말이다. 나는 내 완장이나 한번 더 추켜올렸다.
나를 내쫓으려는 그의 집에서 어쩌다 청하게 된 잠자리는 이상하게도 편했다. 그가 나를 내쫓으려고 하는 것인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편안한 잠자리엿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언제 동이 트나 다시 보고 있을 뿐이었다. 쫓겨나는 순간에 그는 어떨까. 어디선가에서 울음소리가 났다. 그가 울고 있었다. 언제 왔는지 모르는 언니는, "네 서방 울고 있더라."라고 전했다. 언니가 갑자기 나타난 것이 이상했다.
언니가 나타나고, 서방이 울고 있다는 소리나 하고, 나는 내 이름을 모른다. 의용단 완장만이 나의 신분을 말하는 이 순간에, '김명시'라는 이름은 왜 자꾸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는지 모를 일이었다. 이런 수많은 일 속에서도 나는 나였다. 그러니 나는 내일 그가 나를 내쫓기 전까지 이 알 수 없는 일의 흐름을 알아야만 했다.
"네가 잊더라도 우리는 너를 잊지 않을 게야."
언니가 옆에서 말했다. 나를 껴안는 언니의 체온은 이상하게도 느껴지지 않았다.
남는 것이라고는 나의 다짐뿐이었다.
아침이 되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국그릇도, 언니의 흔적도, 그의 흔적도 없다.
"김명시 장군, 어서 나오시오! 있다는 것을 알고 있소!"
나를 부르는 소리, 나는 김명시이다. 끝내 나는 국군에게 쫓기는 구나. 끝내 벼랑으로 몰리는구나.
꼭 전설 속의 한 장면을 하룻밤으로 보낸 것 같았다. 이마에서는 땀이 흐르고 잇었고, 차고 있는 가죽 완장이 축축하게 젖을 정도였다. 며칠이나 이곳에서 실신해있었는지 모르겠으나, 오두막은 미칠듯이 찌고 있었다.
날씨가 너무 좋았다. 능소화 침대에서 한 숨 자다가 크게 들이마시면, 그 튤립인지 뭔지 하는 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낭만적일 것 같았다. 일본에게서 벗어나 국군에게 쫓기는 지금 이 신세에도 나는 서방과의 낭만적인 수간이나 꿈 꾸고 있었다.
"어서 이 문을 여시오!"
그들은 국군이 아닌가. 문을 쉽게 열지 않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인민군인 모양이었다. 나는 문을 열었다. 그리고 또 문을 열었다. 내가 있는 방은 한없이 깊은 곳에 있었다.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문열림 속에서, 나는 이 악몽같은 밤도 끝나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해가 떠있어도, 내가 있는 이 순간은 한겨울의 밤이나 다름 없었다. 이육사라는 시인이 노래를 했던 것처럼, 그저 드넓은 광야에서 나는 한없는 밤을 맞을 뿐이었다.
*
"내가 같이 죽자고 하면 죽을 것이오?"
문득 서방과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대가 죽자고 하면 차라리 같이 죽는 것이 낫겠소. 그 완장을 차고, 장군이라는 소리를 듣는 아내는 별로라."
서방이라는 자의 결의를 확인하려고 물은 것이었으나, 그는 한없이 약하고 부드러운 사람이었다.
"혹시 나에게 실망한 것이오?"
그가 물어왔다. 꿈에서 보았던 매정한 그와는 또 달랐다. 나는 고개를 저었었다.
"실망할리가. 그럴 것이라는 걸 알고 백년을 약속한 것이었습니다."
"장군의 서방이 이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다들 손가락질을 하는데 괜찮소?"
나는 괜찮았다.
"누가 김명시의 서방에게 그런 소리를 하는 겁니까?"
나, 김명시. 장군. 누구보다도 엘리트 교육을 받은 최고의 여성이다. 내가 선택한 사내에게 누가 무엇이라고 말을 할 것인가.
내 서방은 그때 하얗고, 무해한 표정을 지었다. 웃으며 말했다.
"그대를 부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날이 온다면 참 좋을 것 같소."
나는 그날 이후로 한 순간도 내가 김명시가 아니었으면 한 적이 없다. 그런데 오히려 그는 나에게 자꾸 새 이름을 지어주려고 했다. 장군 김명시보다는 다른 이름이 좋겠다고 말이다. 부인이라는 이름 뒤에는 동네 아낙들에게 붙일만한 평범한 이름만 갖다 붙였다. 그는 나의 모든 운동을 반대하는 것 같았다.
눈도 못 뜬 아이에게는 이름을 붙여주지 말자고 했다. 나는 그래도 되는가 싶었다.
*
겨울이기만 했던 곳에 햇살이 거침없이 쏟아진다. 아마도 그가 말했던 여름이 찾아오는 모양이다. 겨울에서의 나는 이름을 몰랐으나, 잠에서 깨서 여름이 되어 햇살을 맞아 보니 알겠다.
우리의 조국은 독립했으며, 나는 지금 인민군으로 국군과 싸우고 있다.
차가웠던 겨울에 가둬두었던 것은 내 사랑하는 서방이며, 나는 끝내 여름으로 혼자 떠나왔다.
총소리가 난다.
나는 어떻게 해야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