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너에게
<오늘도 우리는 한 걸음을 더> 수록
습한 공기와 따가운 볕에 정수리부터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일찍이 프랑스의 여름은 들은 적이 있어서 모자를 가져오기는 했으나, 오자마자 모자로 머리를 망가뜨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모자는 백팩에 걸고 같은 노래만 흘러나오는 이어폰도 뺐다. 낯선 공기와 소리 속으로 스며드는 기분이었다. 프랑스의 7월, 그리고 오후는 시끄러웠다.
서빙을 위해 한껏 차려입은 사람은 묵직한 스테이크가 담긴 접시를 들고,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주변의 시끄러운 소리를 가로질러 나에게 다가왔다. 그 사람은 ‘메릭(Meric)’이라는 명찰을 달고 있는 종업원이었는데, 한국인보다 한국인이 아닌 사람이 더 많은 공간에서 1인용 테이블에 겨우 끼어 앉아있는 나에게 친절을 베푼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파리 공항에 내려 한참 고민하던 끝에, 혼자 숙소로 갈 자신이 없어 일단 ‘프랑스 파리의 야경을 구경해 보세요, 숙소까지 안전하게 모셔다드립니다’라는 슬로건을 내건 소규모 패키지를 신청한 내가 프랑스어를 잘하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지 큰 소리로 천천히 메뉴를 설명했다.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에펠탑에서 내려줄 수 있으실까요? 같은 생존형 프랑스어만 겨우 몇 마디 배워 온 나는 그의 친절에 감사하며 어느 때보다도 기분 좋은 웃음을 지었다. 몇 년 동안 잘 웃지 않아 눈은 물론이고 광대뼈 근처가 아려왔지만 그래도 최대한 감사를 표하고 싶었다. 그는 내 뜻을 이해했는지 뭐라고 알아듣기 어려운 긴 프랑스어로 대답하고는 고갯짓으로 테라스 밖을 가리켰다. 나는 겨우 자리를 잡고 앉은 곳이 테라스에서 먼 안쪽이라서 사실 에펠탑 보기를 포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망은 일렀다. “와아―” 하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여러 사람의 함성 사이에서 프랑스의 상징인 에펠탑은 화려한 빛과 함께 그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테라스로 나가서 에펠탑을 구경하고 싶었다. 하지만 실속 없이 싸서 빈 곳이 많은 캐리어가 내 발목을 잡았다. 세 대나 되는 것을 끌고 나갈 자신은 없었다. 하나만 되었더라도 저녁으로 나온 다 식어 빠진 스테이크와 과하게 많은 감자 샐러드를 포기하고 에펠탑으로 달려갔을 것이다. 친절한 종업원 메릭에게 도와달라고 할까 생각도 하였으나, 결심했을 때는 이미 그가 다른 손님에게 가버린 뒤였다.
에펠탑을 가까이서 보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려고 SNS를 켜서 ‘에펠탑 야경’을 검색하니 그럴듯한 사진이 많이 나왔다. 페이지를 내리며 마음에 드는 사진을 저장하고 있으니 패키지 가이드가 전화를 걸어왔다. 가이드는 근처에 있었는지, 주변과 같은 함성과 기계음이 섞여 대화를 주고받기 어려웠다. 나는 이곳에서의 첫 일정만큼은 망치고 싶지 않아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크고 느리게 말을 이었다.
“여기는 말씀해 주신 그 역의 6번 출구에 있는 레스토랑이에요. 가장 안쪽에 있는 자리라 조금 시끄러운데.”
가이드는 내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는 귀찮다는 듯이 “네”라는 대답만 반복하더니 전화를 끊었다.
‘테라스 앞에 있는 흰색 차량입니다. 제가 앞에 서 있어요.’
일 분 정도 지나고 나서 가이드에게서 연락이 왔다. 나는 답을 하지 않고 가방부터 챙겼다.
가이드는 내가 오랫동안 혼자서 싸워온 G와 비슷하게 생겼다. 하지만 굳이 이 먼 곳까지 와서 G를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얼마 전 다 먹은 과자 봉투처럼 생각을 차근차근 접었다. 한 번이 아닌 두 번을 접은 덕인지 가이드를 보아도 더는 G가 생각나지 않았다. 꽤나 사적인 말을 걸어와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적당한 사교성을 발휘해 거짓으로 대답하면서 보는 프랑스의 야경은 또 다른 거짓말 같았다. 서울의 야경과 마찬가지로 화려하지만 그만큼 빛이 빡빡하지는 않아서인지 서울에서와는 다르게 마음이 조급해지지 않았다. 화려하지만 드문드문 심어진 불빛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프랑스의 야경은 거리를 두고 보는 편이 더 예뻐요. 이마는 창문에서 떼면 좋겠다는 말이에요.”
그는 나름의 조언을 하고는 내려서 사진 한 장을 찍겠냐고 물었다. 그렇게 몇 군데를 추천받던 나는 여전히 프랑스 파리의 심장이라고 믿고 있는 곳에 내렸다.
“여기는 노트르담 앞 광장이에요. 이 원이 파리의 중심인 걸 상징하고, 발을 올리면 파리에 한 번 더 올 수 있다고들 믿어서 여기에서 사진을 찍어요. 찍으시겠어요?”
야경을 찍기에 적절한 곳은 아니었다. 화면에 성당의 모습을 다 담기도 어려웠고, 주변이 밝지도 않았다. 사진을 찍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냥 프랑스에 다시 오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나는 사진 찍기에 좋은 표정을 애써 지으며 광장 바닥에 있는 돌로 조각된 원에 두 발 모두 걸치고 카메라를 든 가이드 쪽을 보았다.
파리 야경 투어 패키지는 나와 세 대의 캐리어를 무사히 숙소로 데려다주었다. 어찌어찌 예약한 4성급 호텔에 내려서 캐리어 세 대를 이끌고 안내를 받아 들어갔다. 내 방에서는 4성급 호텔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서걱거리고 무거운 이불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캐리어 중 가장 가벼운 것을 열었다. 급하게 닥치는 대로 물건을 싼 캐리어는 프랑스 여행 내내 별 쓸모가 없을 것 같았다. 선물로 받은 광복절 기념 모나미 스페셜 에디션만 그럭저럭 쓸모가 있을 것 같았다. 그것만 꺼내 파우더룸에 두고는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나의 갑작스러운 여행에 황당해하던 사람들에게는 잊지 않고 프랑스에 잘 도착했다는 인사를 남겼다. 눈을 감았으나 잠은 오지 않았다. 미친 사람처럼 짐을 싸 들고 여기로 오기까지 했던 생각은 나와 발맞추지 않고 제멋대로 흘러갔다. 충동적으로 결정한 여행이었으나, 첫날은 제법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나는 이 여행을 오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같은 생각은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야경을 구경할 때처럼 생각을 접고, 또 접어버리니 시끄럽게 주변을 맴돌던 생각도 잠잠해지는 것 같았다. 주변이 더 조용해졌다. 파리에서의 첫 밤을 그렇게 지새우고, 나는 나흘 동안 방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다.
나흘을 지낸 프랑스의 여름은 한국과 달랐다. 비가 내려도 비린내가 나지 않았다. 나는 아무 냄새 없는 바람을 느끼기 위해 창문을 조금 열고 그 앞에 앉았다. 누구도 알아볼 수 없을 글씨로 나를 스치는 모든 것을 진심으로 갈겨썼다. 차라리 그리는 것이 나을 정도인 글씨는, 일본어며 중국어, 영어에 생존형 프랑스어까지 중구난방이었다. G가 선물로 준, 그 모나미 펜을 꼭두각시로 내세워서 종이에 화풀이하는 중이기도 했다.
그날도 이렇게 비가 내렸다. 나는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는 초 단위로 쪼개서 살아야만 했다. 그 쪼개는 시간 중 하나는 바로 오랫동안 꿈꿔온 문화재 복원 자격증이었는데, 준비를 위해서는 제법 많은 돈이 필요했다. 사실 모든 시간은 그 자격증을 위해서만 살아온 것이기도 했다. 자격증 취득 과정을 본격적으로 알아보던 중, 나는 이십 대 중반의 여성은 그 일을 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담당자의 말을 들었다.
아니요, 학원으로 오실 필요 없습니다. 테스트도 할 필요가 없어요. 선생님처럼 여성분들이 많이들 한다고는 하는데, 나중에는 체력적으로 힘들다고 그만두시더라고요. 물리적인 것은 어쩔 수 없는 거죠, 조금 더 편한 길로 안내해드릴까요? 차라리 목조건축 말고 다른 쪽으로 지원을 해보심이.
궁금하지도 않은 다른 사람들의 사례까지 들어가며 친절하게 안내하는 말의 결론은 간단했다. 복원할 것은 무게가 나가는데, 내 힘으로는 작업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오 년 동안 노력한 사실과는 관계없이 자격증 준비를 위한 수업도 듣기 어렵다고 했다.
전화를 받은 후, 박물관 계단에 쪼그려 앉아 커피를 마시며 한숨만 쉬고 있는 나에게 G는 선물을 주었다. 한참 나를 보고만 있더니 위로의 선물이라고 덧붙였다. 나는 G의 허락을 받고 그 자리에서 선물을 풀어보았다. 내가 문화재 관리사 시험에 합격하고 나면 꼭 들고 다니고 싶다고 했던 볼펜이었다.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서 강해진다고 하잖아, 더 단단해져서 다시 도전하면 될 일 가지고. 서운한 건 알겠는데 기운 빠져 보이니까 나까지 김이 빠지네. 정신 차리고 조금 더 기다렸다가 다시 준비하면 되지. 한 번 거절당한 게 대수겠냐?”
“매사가 쉽고, 좋겠네.”
G는 언제나 쉽게 말했다. 그는 나의 친구들에게 사람 좋고 다정하기로 유명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다정함은 언제나 가볍고 쉬웠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너무나도 무거워서 나를 밀어냈는데, G는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설명했다. 그러니 몇 번이나 진심을 담아 건넨 나의 말도 쉽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내가 고백했을 때도 대수롭지 않게 거절하던 사람이었다.
“내가 눈치 없이 굴었어, 인정해. 네 말처럼 적절한 때가 있을 텐데 마음이 앞섰네. 일단, 뭐든 다시 준비할 거야. 어쨌든 선물은 고마워. 잘 써지겠다.”
죽어도 대화는 내가 마무리를 지어야 했다. 대답하고 나니 눈가로 열이 몰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하늘을 쳐다봤으나, 온통 먹구름뿐이었다. 매사에 가벼운 그도, 그리고 가벼운 그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굴고 있는 나도 모두 우스웠다. 그와 더 이야기를 나누면 내가 이렇게까지 진심을 쏟은 것이 하찮아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대화를 마무리하기에 적당한 말만 남기고는 우산을 폈다. 곱게 폈으면 좋았을 것을, 신경질적으로 펼 수밖에 없었다.
“가서 쉬어. 보니까, 오늘도 기분상 집으로 가기는 글렀네.”
그는 나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나는 그의 말처럼 집으로 가지 않았다. 박물관에서 세 정거장 떨어진 곳에 있는 호텔로 향했다. 차라리 드라마 속 비운의 여주인공이 되어 비나 맞았으면 좋을 텐데, 생각일 뿐 그럴 용기는 나지 않았다. 호텔 방에 들어간 나는 습관적으로 바닥에 모든 짐을 버리듯 내려놓았다. 주머니에 있는 볼펜만 딸각거렸다. 볼펜은 G와는 다르게 묵직했다.
정돈되지 않은 글자들을 G가 준 볼펜으로 쓰다 보니 아무래도 그날이 생각날 수밖에 없었다. 가볍고 성의 없게 움직이는 손과 달리 가슴은 꽉 끼는 옷을 입은 것처럼 답답했다. 자격증 준비를 위한 수업을 거절당하고 글이나 쓰겠다고 생각한 후로는 오랜만에 느끼는 것이었다.
쉽게 기분이 풀리지 않아 글씨를 쓰던 것도 멈추고 볼펜이나 딸각거리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났다. 나를 찾지 말아 달라고 호텔 방 문 앞에 카드를 걸었지만 내가 방에서 너무 나가지 않았던 탓에 걱정이 되었는지, 호텔 매니저가 방으로 직접 찾아왔다.
걸쇠 걸린 문틈으로 그는 나를 찾아온 사정을 서툰 영어를 써가며 천천히 말했다. 나는 멋쩍게 웃으며 쉬는 중이라고, 관광명소에 와서 나가지 못해 아쉽다고 답하면서 기회가 되면 조식이라도 먹으러 나가겠다고 했다. 그가 나를 훑어보는 눈빛과 삐딱한 태도, 미심쩍은 어조는 노골적으로 내 행동이 비정상적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아주 잠깐 인사를 나눈 뒤, 나는 버석거리는 촉감의 이불 위로 몸을 내던졌다. 팔을 뻗어 보조배터리를 달고 있어 무거운 핸드폰을 들었다. 고민도 하지 않고 또 다른 소규모 패키지를 신청하기로 했다. 모든 사람이 사랑하는 야경을 선보인다는 ‘몽 생 미셸’로의 패키지였다.
패키지는 20만 원을 훌쩍 넘겼다. 어차피 며칠을 나가지 않았기에 돈 걱정은 없이 결제하였으나, 막상 나갈 때가 되니 괜히 신고 있는 양말을 뚫고 발바닥에 가시가 박히는 기분이었다. 잠깐은 가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제가 완료되었다는 문자까지 보니 어차피 차만 타고 다닐 것인데 뭐가 문제냐는 생각도 들었다.
이 호텔에 들어온 지 닷새 만에 나가자, 로비에 있던 직원들은 나에게 어디로 가냐고 물었다. 몽 생 미셸로 간다고 대답하다가, 루이비통 건물 앞으로 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직원 한 명이 택시를 불러주었다. 나는 그렇게 내 돈으로 호사를 누리면서 택시를 타고 소규모 패키지의 출발 지점으로 향했다.
무박 2일을 보낼 사람들이 제각기 다른 차림으로 모여 있었다.
“무박 2일이면 짧지 않은 시간이에요. 약 삼십 시간을 함께 보낼 사람들에게 간단하게 자기소개하고 바로 출발합시다.”
가이드의 말에 이번에는 어떤 거짓말을 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사실 저는 작가 지망생이 되었고,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돈을 모아서 이곳으로 날아오게 되었습니다. 이곳에 오지 않으면 미쳐서 G를 죽여버릴까 걱정이 되어 도망치듯 왔습니다. 호텔에서 몇 날 며칠 나오지 않으니 저를 미친 사람으로 취급해 일단 눈에 보이는 이 패키지를 신청했습니다. 이렇게 말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런 사실들을 두고 고민하는 사이에 시간은 꽤 흐른 모양이었다. 가이드는 그가 찬 손목시계와 나를 번갈아 보았다. 그는 결국 작게 한숨을 쉬었다. 나는 그 한숨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생각도 해본 적 없는 말을 거짓이 아닌 것처럼 말했다.
“대학원 준비 중이었는데, 한 번 떨어져서 취업이나 할까 고민만 되길래 여행부터 와버렸어요. 지금은 백수입니다. 책만 좀 봐서 아는 것도 별로 없고 재미도 없겠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내가 너무 뜸을 들인 모양이었다. 소개가 끝남과 동시에 벤치에 앉아서 나를 보고 있던 사람들은 참고 있던 것처럼 한마디씩 거들었다. 대개는 그런 옷을 입고 사진을 찍으면 후회하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나는 대답 대신 미처 생각하지 못해서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호텔에서 도망치듯 나온 여행이었기 때문에 사람들과 어울려서 좋은 추억을 만드는 것은 기대하지 않았다. 11인승인 차의 가장 뒷자리, 거기에서도 구석에 앉아 이름 모를 카페에서 팔던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있는 얼음을 씹었다. 사람들이 나누는 평범하고 사교적인 대화에 끼지 않는 것은 덤이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은 물론이고, 보이지 않는 것까지도 모두 대화의 주제로 삼았다. 갑작스레 전향한 나보다도 이 사람들이 더 작가에 잘 어울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가이드는 잠깐의 정적을 기회로 삼아 말을 걸었다.
“우리 시큰둥하신 분은 이름이 뭐였죠? 소개할 때도 말씀하시지 않았던 것 같아서요. 대학원 지망생분?”
거짓말이란 임기응변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내가 했던 거짓말을 완벽하게 생각해낼 재주는 없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나에게 한 말인 줄 모르고 있다가, 뒤늦게 내가 대학원 준비 중이라고 소개했던 것이 생각났다.
“아, 저요? 얼음 씹느라고 입이 얼어서 바로 답 못했어요. 저 말씀 하시는 거죠?”
“네, 우리 대학원 지망생분은 이름이 뭐예요? 나이가 스물여섯이라고 하셨나?”
“아 네. 스물여섯이고, 이름은 그냥 평범한데요.”
“요즘 친구들은 이름 말하는 걸 별로 안 좋아하는 모양이네요. 그러면 우리 돌아가면서 무서운 이야기나 할까요? 마침 비도 한두 방울 떨어지고 차 안이라 도망도 못 가니까요.”
G를 닮은 사람이 여기에 또 있었다.
G는 사교성이 좋은 사람이었다. 그는 사범 대학교 학생이었는데, ‘교사’라는 말보다 ‘선생님’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렸다. 어색한 침묵이 편했던 나와 달리 그는 한순간이라도 대화에 여백이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처럼 굴었다. 그래서 마주 앉아 이야기하지 않는 짧은 순간이 우리를 찾아올 때면, G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어 대화를 이어 나가고는 했다.
“오늘 커피는 어때?”
“괜찮은 것 같아. 여기를 용케 알아냈네. 지하에 있는데. 커피 맛있다.”
“찾아보니까 금방 나오던데, 뭐. 선물은 어때?”
“내가 좋아하는 거로 줬던데 당연히 좋지.”
그는 나와 대화가 끊기면 주변 사람들을 끌어들여서라도 대화를 이으려고 했다. 그날도 그랬다.
“이 테이블에 오늘 생일인 사람 있는데, 생일인 사람한테는 해주는 거 없나요?”
“아, 생일이세요? 잠시만요. 사장님께 금방 말씀드릴게요!”
“너 오늘 생일인데 뭐라도 해줬으면 좋겠다.”
그의 말에 뭐라고 대꾸를 해야 할지 몰랐던 나는 빨대로 커피를 마시다 말고 멈춰서 G만 봤다. 빨대를 믿고 잔을 앞으로 빼서 마시는 버릇이 있는 나를 위해 그는 잔을 내 쪽으로 가까이 밀어주면서 웃었다. 곧 그 작은 카페의 사장이 케이크 두 조각을 가지고 와서는 생일 축하한다고 말해주었다. G의 사교성은 이렇게 또 다른 친절로 다가오곤 했다.
우습게도 나는 G를 만나지 않기로 한 이후로 빨대로 커피를 마시는 습관도 없어졌다. 잔을 들고 천천히 마시게 되었다. 빨대를 쓸 때면, G의 가벼운 대화와 스케일 큰 사교성, 그리고 그런 그와 같았으면 좋겠다고 조금이라도 생각했던 과거의 내가 생각나서 싫었다. 이렇게 사람의 습관을 바꿀 정도의 성격이면, 진짜 무서운 것 아닌가 싶었다.
“지금 이렇게 빈틈 없이 말을 거는 가이드님이 제일 무서운데요?”
G와의 일을 구구절절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가이드에게 한 말은 진심이었다. 별다른 수확이 없었던 내 말을 뒤로하고,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겪었던 무서운 일을 하나씩 꺼냈다. 묵직해서 제대로 풀 수도 없어진 나의 이야기보따리와는 달리 그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쉽게 풀어서 선보였다. 직장 동료와 애인, 부모님에 반려동물까지 사람들을 무섭게 하는 것은 정말 많았다.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들을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저렇게 하는 것이 모두 G의 복사판 같았다.
G와 꼭 닮은 사람들로 꽉 찬 차는 달리고 달려서 몽 생 미셸로 향했다. 합의 끝에 북부의 다른 도시들은 거치지 않았고 곧장 몽 생 미셸로 가기로 했다. 덕분에 예정보다 빠르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는 섬의 입구에서 사진을 찍고 각자 움직이겠다는 말을 듣고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바라던 순간이었다. 프랑스인이 아닌 사람들도 사랑한다는 몽 생 미셸은, 사실 버터 쿠키를 사고 싶은 곳일 뿐이었다. 이곳에서 대단한 감상을 할 생각은 없었다. 무엇보다 그 높은 곳까지 힘들여서 올라갈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각자 움직이라고 하면서도 짝 없이 혼자 와서는 잘 어울리지 않는 나를 절대 가만두지 않을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G와 같은 사람들이었으니까 말이다. 나는 붙잡혀서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수도원까지 가는 골목은 수제 표지판이 볼거리로 유명했는데, 그중에서도 엽서가 많은 곳이 유독 눈에 띄었다.
“저는 여기 잠깐 있다가 따라갈 수 있으면 갈게요. 엽서를 좀 사고 싶어서.”
“어디에 쓰게요?”
나는 대답은 하지 않고 웃기만 했다. 내가 정한 또 하나의 ‘가상의 나’의 모습이었다. 적어도 내가 지금까지 만났던 사람들은, 이렇게 웃기만 하면 더는 말을 시키지 않았다. 가이드 역시 내가 거쳐왔던 사람들과 다르지 않았다. 기념품점에 들어가서 엽서를 보고 있는데, 죄다 몽 생 미셸의 사진을 찍은 것이나 에펠탑, 아니면 노르망디의 풍경뿐이었다. 사진으로 찍을 만한 풍경만이 전부라 그다지 사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G가 했던 것처럼 별 필요도 없는 짓을 하나 해보기로 했다. 엽서를 두 장 사서, 하나는 나에게 하나는 예전 G가 살았던 집으로 보내기로 했다.
G가 이사를 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일단 뭐든 보내고 나면 속이 후련할 것 같았다. 나는 G가 선물해 준, 광복절 기념 스페셜 에디션이라는 것 말고는 별로 큰 의미를 생각하고 싶지 않은 그 볼펜을 꺼내 들었다. 막상 그가 준 볼펜으로, 그것도 그에게 엽서를 쓰려고 하니 생각이 쉽게 정리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점원에게 이 기념품 가게가 몇 시에 문을 닫는지 물었다. 점원은 일전 에펠탑 앞의 레스토랑에서 만났던 메릭과 달리 불친절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었다. 말은 빠르고 발음은 공부했던 생존형 프랑스어로는 쉽게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몇 번이고 끈질기게 물은 끝에, 나는 점원에게서 이 기념품점이 8시에 문을 닫는다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불친절한 점원에게는 예의상이라도 고맙다는 말은 남기고 싶지 않았다. 이따 오겠다는 말만 했다. 나는 기념품 가게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작은 성당으로 향했다. 입구를 확인하고 들어가기까지, 정말 ‘끌려가듯’ 들어갔다. 웅장한 큰 수도원을 뒤에 두고 있는, 거리 사이에 낀 작은 성당은 2유로를 내면 초를 밝힐 수 있는 아담한 곳이었다.
나는 4유로를 내고 초를 두 개 밝혔다. 나와 G를 위한 것이었다. 아니, 과거의 나와 G를 떠나보낼 나를 위한 것이었다.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을 지나서 성당의 중앙으로 걸어갔다. 오가기 불편한 자리에 있어, 아무도 오지 않을 것 같은 곳에 있는 장의자에 앉았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바로 옆에 낯선 사람이 와서 앉았다. 나는 옆 사람을 보는 대신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제발 이 사람이 내 옆에 없었으면 좋겠다는 소원으로 4유로를 날릴 수는 없었다. 최대한 나에게 집중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는 자연스럽게 나보다는 G에게 더 집중하게 됐다. 성당, 나, G. 그는 내가 혼자 여행을 왔음에도 늘 내 옆에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니 성당도 불편했다. 엄숙한 자세로 기도하고 있는 사람과, 반대로 관광지라 모든 것을 즐겁게만 보는 사람들이 섞인 공간이었다. 그들은 G와 나처럼 서로를 신기하게 보고, 또 서로 관심을 두긴 했으나 절대 어울릴 수 없는 사람들 같았다. 그 지점에서 불편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4유로에 진심을 담다 말고 자리에서 일어나 종종걸음으로 기념품점에 돌아갔다.
나는 여전히 시큰둥한 표정의 직원을 뒤로하고 창가에 있는 스탠딩 테이블에 가방을 올리고 G가 준 펜을 꺼냈다.
‘너는 그때도 지금도 내 옆에서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아.’
막상 쓰기 시작하니 손끝이 무거워졌다. 글씨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과하게 부드러운 필체였다. 원래는 정사각형에 각진 글씨를 고수했는데, 이상하게 G와 관련되면 필체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내용도 마찬가지였다. 편지로는 최하점이었다.
내 얼굴엔 기분이 드러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가이드는 기념품 가게의 문을 열고 들어와 익숙한 듯 점원에게 인사를 하고는, 내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과격한 발걸음치고는 가벼워 보였다.
“이제 가실까요? 올라가야죠. 다들 기다리고 있어요.”
“어딜요?”
이미 이곳으로 오는 길에도 멀리서부터 몽 생 미셸은 봤다. 입구를 지나 이 기념품점에서도 몽 생 미셸을 보고 있는데 어디를 가자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큰마음을 먹고 쓰기 시작한 할 말을 잃은 엽서도 아직 내 앞에 있어서 자리를 뜨고 싶지는 않았다.
“제가 아직 엽서를 다 못 썼는데요.”
“일단 올라가 보면, 이런 엽서 말고도 다른 좋은 엽서 많을 거예요.”
가이드의 흔한 상술 같았다. 파리 공항부터 여기까지 똑같은 사진의 엽서만 봐온 나에게 믿음을 줄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엽서 좋아하시는 것 같은데, 다 고객님을 위해서예요. 다들 정말 좋다고 한다니까요? 수도원 안에 있는 기념품점까지 올라가면 이런 엽서를 붙잡고 있지 않아도 된다니까 그러네.”
상술이에요?라는 말이 턱 밑까지 찼으나 말을 할 수는 없었다. 호의인지 아닌지를 떠나서 소규모 패키지라도 그 목적은 분명 말 그대로 ‘패키지’에 있으니까 말이다. 나는 여태껏 해본 적도 없는 티 나는 탄식을 하며 가이드를 살짝 올려다보았다. 이번만큼은 진심으로 노려보는 것이 맞기는 했지만, 여차하면 원래 이런 눈매라고 핑계를 댈 생각이었다.
“다 그쪽을 위해서 그러는 거예요, 노려보지 마세요.”
G에게 고백했던 그날도 들었던 말이다.
여름치고도 으슬으슬한 몽 생 미셸의 저녁과 똑 닮은, 한국의 초겨울이었다. 바람은 불고 눈은 내리지 않아 말이 초겨울이지 삭막하기만 한 여러 날 중 하루였다. 나는 그날 기분을 내기 위해서 머리를 높게 묶고 옅게 화장을 했다. G와 만나는 날은 많이 걷는 날이라 편하게 입어야 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고 편하면서도 적당히 멋스러워야만 했다.
G와 처음 만났을 때 했던 빨간 털목도리를 둘렀다. 목도리는 올이 거칠고 따가웠지만, 하고 나면 기분은 좋았다. 빨간 목도리는 내가 제일 잘 어울린다는 G의 말이 떠올라서였다.
G는 사교성이 좋고 친절한 사람이지만, 시간 개념이 없었다. 어슴푸레한 하늘을 등지고 버스 정류장에 서서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면서 멀뚱히 있는 나는, 그에게 사람 구경이 좋아 일찍이 나와 있는 사람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좋았다. 나는 G가 나도 모르는 나의 성향을 알고 있을 정도로 나에게 관심이 많다고 믿고 있었다.
삼십 분이 지나도 오지 않는 G에게 연락하려고 핸드폰을 들었다. 대중교통에서 대화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공공장소에서의 소음을 싫어하는 그에게 나는 빨갛게 얼어서 잘 펴지지도 않는 손가락으로 문자를 보냈다.
어디야?
춥지? 털목도리는 하고 나왔어? 길이 밀리네. 버스 말고 지하철 탈 걸 그랬나 봐.
하고 나왔어. 근데 어떻게 알았어? 내가 털목도리 한 거.
늘 하고 있길래. 쉽게 찾을 수 있겠다.
그는 꽤 빠른 속도로 이어서 답장을 보냈다.
어디 들어가서 기다리고 있을래? 금방 도착할 것 같은데.
그러면 같이 들어가자. 목도리가 두꺼워서 견딜만해. 답장은 힘들 듯! 손 시려.
금방 도착한다고 했으나, 이십 분이 지나고 삼십 분이 지나도 그는 오지 않았다. 대단한 장사라고 하더라도 이렇게 오래 서 있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새 어두워진 하늘에서는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가 겨울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래 기다린다고 서운하지는 않았다. 그날의 목적은 G와 그 추운 길을 걸으면서, 몇 번이고 꿈에서도 준비했던 고백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지각조차도 고백 연습을 위한 것 같았다.
한참을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G에게 할 말을 연습했다. 입이 얼어 잘 움직이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G는 조금 더 늦을 것 같다며, 추울 테니 어디든 들어가서 기다려달라고 했다. 내가 고백하려고 생각한 장소는 버스 정류장이었으나, G의 말을 안 들을 수 없었다.
그렇게 약속한 7시를 지나 9시가 되어서야 그는 내가 기다리고 있는 카페로 들어왔다. G가 평소 선호하는 비싸고 조용한 카페는 아니었으나, 이른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내기에는 적절한 곳이었다. 나는 G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막상 그의 얼굴을 보니, 바람에 헝클어진 머리와 이미 번졌을 화장이 마음에 걸렸다. G보다는 그런 나의 모습에 서운해하며, 나는 늘 그렇듯 나보다 키가 약간 큰 G를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보지 마. 딱히 노려보는 거 아닌 거, 알고 있다고 해도 그러네.”
“맞아, 그냥 본 거야.”
“삐졌어? 밖에서 꽤 기다렸지?”
그날 머리를 높이 올려 묶지 않았더라면, 화장을 하지 않았더라면, 신발장 앞에 서서 편하면서 예쁘고, 또 그보다 키가 커 보이지 않을 신발을 고르지 않았더라면. 그 모든 시간이 없었더라면 나는 아마 오래 기다렸다고 투정을 부리듯 따져 물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들인 노력과 시간은 그의 앞에서 상상하고 연습한 대로 완벽해야 한다고만 생각하게 했다.
막상 나의 기다림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G를 마주하니 그를 앞에 두고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어쩐지 그와 눈이 마주치면 눈물부터 쏟아질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콧대와 손에 힘을 주고, 그 힘으로 어떻게든 버텼다. 마침 카페를 드나드는 사람들이 잘 보이는 자리여서 다행이었다. 나는 여러 사람에게 내 눈물을 보이는 대신 지나가는 사람들만 보았다.
“할 말 있지?”
G는 꼭 나에게 고백이라도 맡겨 놓은 사람처럼 굴었다.
“응.”
“해봐. 안 그래도 오늘 할 말 있는 거 같아서 나왔어. 며칠 전 너희 집 앞에 갔을 때부터 할 말 있어 보이더라.”
“나한테 뭐라도 맡겨 놓은 사람 같다?”
“누가 고백을 그렇게 해. 진심으로 해야지.”
나는 원래 생각나는 대로 말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몇 번이고 생각하고, 혼자서 상황 설정을 해서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친 뒤에 수차례 연습을 하고 나서야 겨우 한 마디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G에게 고백하는 그 순간도 그가 나를 만나러 집 앞으로 와주었을 때부터 계속했던 상상 중 하나였다. 다만 상상으로 연습한 장소와 다른 곳이라는 사실이 신경 쓰였다.
“그냥 기다리다가 들어주면 안 되는 거야?”
“너 이미 예쁜 상황, 좋은 상황은 다 설정해놓고 연습했을 거 아니야.”
“아니, 내 말은.”
“나 말고 다른 사람한테 고백할 때 그렇게 해. 다 너를 위해서 그러는 거야. 하고 싶은 고백, 더 좋아하는 사람 생기면 그때 해.”
“좋아하는데도? 다른 사람한테 말하라고?”
“네가 그린 상황이 이런 건 아닐 거 아니야. 널 기다려주는 사람에게 하라고.”
“왜?”
“해봐.”
그의 말대로 나는 이런 상황에서는 고백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준비한 말은 겨우 세 글자였지만, 나를 기다려주는 사람의 얼굴을 보자마자 달려가서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이렇게 몇 시간을 기다렸음에도 초를 치는 사람에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좋아해.”
드라마 속 주인공이 하던 것처럼 절절하게 말하고 싶었던 세 글자는 너무나도 쉽게 나왔다. 연습할 때는 한 글자 한 글자에 힘을 실은 탓에 쉽게 입 밖으로 나오지도 않던 말이, G를 앞에 두고 있으니 그렇게 가볍고 건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학교 다닐 때처럼 선생님이 시켜 소설 속 주인공의 대사를 대신 읊는 것만 같았다.
연습하지 않은 말이 나온 것과 다름없었다. 나는 당황스러운데, G는 내 말을 듣고는 살짝 일어나 나의 어깨를 토닥여주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잘했어. 나중에도 할 수 있을 거야.”
“내가 생각한 건 이런 게 아니었어.”
“알아. 서운하게 생각하지 마, 초 친 건 미안해. 그렇게 노려봐도 소용없다니까?”
그는 꼭 나의 고백 연습이나 들어주는 사람 같더니, 또 갑자기 나를 좋아하는 것처럼 굴었다. 그는 나의 손을 잡고 똑바로 마주한 채로 말해주었다.
“다 별거 아니야. 다 너를 위해서라고, 내가 왜 이러는지 나중에 이해할 수 있을 거야. 다음 주에는 영화 볼까?”
나에게만 의미 있는 평범한 초겨울의 저녁이었다. 어느덧 바닥에는 눈이 조금 쌓였고, 우리는 늘 그렇듯 꽉 막힌 차도 옆을 천천히 걸었다. 운전대를 잡고 길 한가운데서 오가지 못하는 사람들에 비하면 우리가 걷는 길은 쉽고 편했다. 그런 만큼 평범한 대화만 오갔다. 그는 헤어질 무렵, 나의 미사여구 하나 없어 절절하지 못한 고백도 참신했다고 했다. 하지만 G는 때가 되면 다 안다, 다 G 본인이 아닌 나를 위한 일이라고 말하며 한 번 더 거절했다. 그러면서도 거절당하는 것이 큰일은 아니라고 했다. 달라질 것이 없다고도 했다. 나는 잘 딛고 일어날 수 있다고 위로해 주었다.
발끝에서 툭 하는 소리가 났다. 짧은 순간 엄지발가락에 열이 오르는 것 같더니, 조금씩 아리기 시작했다. 직사각형의 큰 돌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눈앞에는 정신을 차리고 걸어야만 하는, 높고 불규칙한 돌로 만들어진 계단이 있다. 포장하지 않아 울퉁불퉁한 비탈길은 끝나 있었다.
“이것만 올라가면 금방이에요. 다들 힘내서 올라갑시다! 수도원 안에서 보는 야경도 멋져요. 여러분과 같은 관광객을 위한, 이 섬의 전망대와 다름이 없죠. 복잡한 생각, 근심, 걱정을 싹 다 날려준다고요.”
그 오랜 시간을 운전하고 와서도 기운차게 외칠 힘이 남아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나는 가이드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계단을 오르기로 했다. 제법 길고 가파른 길이라 오르다 보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G 생각을 조금이라도 떨칠 수 있을 것 같았다.
생각을 좇으며 발걸음이 옮겨지는 대로 계단을 올라서 숨이 제멋대로 차올랐다. 그즈음이 되어서야 끝이 보였다. 이상하게도 계단의 끝을 보자마자 나는 G의 거절을 진심으로 받아들일 때가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고개를 드니 사람들은 이런 나의 사정을 모르면서도 응원이라도 하는 것처럼 자리를 뜨지 않고 모두 나만 보고 있었다. 맨 뒤에서 느리게 계단을 오르던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과 발 앞에 놓인 마지막 계단을 번갈아 보았다.
이제 나는 이 마지막 계단을 올라 숨만 고르고 나면, 내 말을 들을 수 없는 G에게 다시 한번 고백할 것이다. 그 순간은 누가 뭐라고 해도 진심이었다고, 너와 있던 시간을 들어낼 수 없을 정도로, 그리고 너와 있던 시간을 들어내지 않아도 될 정도로 너를 좋아했다고 말이다.
세차게 불던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익숙한 물 비린내가 나는 바람이 나의 등을 떠밀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이곳에서 보인 적 없었을 밝은 표정을 짓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 시작으로 두 눈을 질끈 감고 양손은 주먹을 쥐었다. 무릎을 높이 들었다가 내려놓으며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나는, 내가 이곳에서 밟을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마지막 계단을 밟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