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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베트 Jul 01. 2020

아버지를 죽이지 못한 아들

[뒷북 감상문] 애드 아스트라 Ad Astra 

스포일러 주의. 


애초에 이 영화 Ad Astra가 본격 SF영화일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나는 영화를 볼 때 과학적으로 정확한 기술이나 스토리텔링을 거의 기대하지 않는다. 과학적인 부정확함에 너무나 여러 번 실망하기도 했지만, 그 보다는 본질적으로 SF라는 장르 역시 과학교과서가 아닌 인간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한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을 바꿨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영화에서 내 주목을 끈 건 우주선 밖에 매달린 브래드 피트가 막 발사된 우주선으로 침투한다는 만화 같은 발상도 아니고*, 해왕성 주변 궤도에 머무른 조그마한 우주선이 전 지구의 생명을 모두 파괴할 막강한 전자파 폭풍을 내뿜는다는 이해하기 어려운 설정도 아니었다. 해왕성 궤도 상 무중력상태에서 부자가 고전역학을 무시하고 벌인 액션 신 역시 몹시 말이 안 되긴 하지만 넘어가줄 수 있었다. 일단 할리우드 액션신에서 고전역학의 부정확함에 실망한다면 그건 콘텐트를 잘못 선택한 당신의 잘못이라고 봐야 한다**. 


초반부터 중반 어느 정도까지 이 영화의 미장센은 Martian이나 First Man과 같이 '진지한 SF영화들'을 연상시킨다. 지구를 벗어났을 때 인간이 얼마나 취약한 존재이며, 존재 자체를 얼마나 지구환경에 의존하고 있는지 생생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상황묘사는 그저 ‘진지한 공상과학영화'의 인상을 주려는 의도였을 뿐, 영화 전체의 기조는 무대의 규모를 지중해에서 태양계로 키운 그리스비극에 가깝다.  


흥미로운 점은, 스토리텔링 자체는 그리스비극 식인데 실제 이 ‘드라마’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는 일반적인 그리스비극과 거의 반대란 점이다. 


아들 로이 맥브라이드(브래드 피트)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여러 영웅들처럼 거의 아버지를 보지 못한 채 어린 시절을 보냈다. 헤라클레스나 페루세우스, 테세우스가 그랬던 것처럼 아버지와 조우하기 위해서 그는 막대한 위험을 무릅써야 했다. (이미 출발한 우주선에 올라타는 건 헤라클레스도 못해본 모험이다.)  


또한 아버지와 맞닥뜨린다는 건 로이 맥브라이드에게 유령선에 올라타는 것과 같은 공포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혈압이 80 이상 올라가지 않는 로이 맥브라이드도 아버지와 만나게 되는 순간 혈압이 올라가고 만다. 물론 그 긴장과 공포의 원인이 단지 위험하고 낯선 유령선 같은 우주정거장 때문은 아니다. 아버지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에겐 불편했다. 


한 가지 더, 그리스신화의 영웅들이 먼 길을 떠날 때 그 목적지는 대개 바다 건너편에 있었다. 우주정거장이 위치한 곳이 바로 ‘바다의 신’을 의미하는 해왕성이란 게 과연 순전히 우연의 일치인지, 아니면 그저 태양계 가장 바깥에 위치한 ‘행성’이기 때문에 나온 설정인지 알 수는 없다.  


그렇게 수많은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그리스신화에서 흔히 볼 수 있듯 아버지를 극복하는 아들의 전형성이 이 영화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그리스신화 속의 아들들은 부친에게 인정받을만한 뛰어난 업적을 거두거나, 혹은 부친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물증을 제시한다. 극단적으로 오이디푸스처럼 부친을 살해하고 그 뒤를 잇기도 한다. 부친살해는 그리스신화나 여타 많은 신화에서 볼 수 있는 극단적인 알파메일의 주도권 싸움의 사례다. 


향수병에 걸린 ‘선원’들의 선상반란을 ‘진압’한 아버지 클리포드 맥브라이드(토미 리 존스 분)은 이아손이나 테세우스 같은 전형적 알파메일이다. 그에겐 바다 건너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이 중요하다. 가족이나 고향의 안위와 같은 문제는 모두 그 아래에 있다.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건 그에게 곧 죽음과 다름없다. 어떻게 보면 심오한 존재론적 고뇌 같지만, 또 어떻게 보면 매우 천문학적인 규모로 하는 영역표시행위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영화에서 그렇듯 인류역사에서 가부장시대는 끝나간다. 가부장시대 덕분에 존재할 수 있었던 수많은 모험가들은 이제 현대 기준에서 못쓸 악당이 됐다. 과거에 온갖 난관과 위험을 무릅썼다는 이유로 경외 받던 콜럼버스, 바스코다가마, 마젤란 같은 모험가들은 이제 돈과 이익을 좇아 폭력을 행사한 불한당으로 취급 받는다. 밖에 나가 모험하는 남자들은 이제 더 이상 존경도 사랑도 받지 못한다. 집안 울타리 안에 머물며 아내와 자녀들을 보살피는 게 남자들이 지켜야 할 가장 큰 덕목이 됐다.  


집에 없는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자라던 자녀들은 이제는 아버지를 그리지도, 아버지에게 인정받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아버지 없이 자란 어린 시절을 한탄하고 아버지를 증오한다. 아버지들은 돌아갈 데가 없다. 아들 맥브라이드가 아버지를 맞닥뜨리는데 큰 용기가 필요했듯, 아버지들에게도 집안으로 돌아가는데 큰 용기가 필요하다. 어떤 아버지들에겐 그게 대양을 건너고 낯선 나라를 탐험하는 것보다 더 두려운 일이다.  


결국 영화 속에서 아버지 맥브라이드는 서구의 가부장제를 상징한다. 그리고 그 서구의 가부장제가 주도했던 팽창주의, 제국주의, 자본주의, 산업화 같은 것들은 지금 부도덕하고 몹쓸 구습으로 여겨진다. 사람들은 고대그리스문화가 태동하기 전 모계사회로 돌아가려 하고 있다. 모계사회의 회귀는 영화 속에서 외계인 탐사 프로젝트를 철회하는 것으로 은유됐다.  


나는 이 영화가 그리스신화나 가부장제의 폐지를 의도적으로 은유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시나리오 역시 사람이 쓰는 글에서 나오는 것이니 글은 쓰는 사람의 의식이나 무의식을 철저히 반영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면 자연히 시나리오작가나 감독의 세계관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가부장제든 모계사회든, 인간이 하는 일은 언제나 불완전하다. 따라서 그 어느 체제도 절대적으로 신봉할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불편한 진실이 있다면,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과학기술과 풍요의 기반에 서구식 가부장제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내와 아이를 뒤로 한 채 죽음을 불사하고 미지의 세계로 달려나가게 한 그 동력은, 바로 지금 모든 정치적으로 올바른 사람들이 극도로 혐오하는 폭력적이고 이기적인 팽창주의와 제국주의였다는 거다. 


동물의 세계에서나 인간의 세계에서나 아버지는 아들보다 먼저 죽어야 한다. 만일 아버지가 아들의 생존을 위협한다면, 아들은 아버지를 죽여야 한다. 불과 얼마 전까지도 인간들은 그렇게 살아왔다. 문명화된 사회에서 물리적으로나 심정적으로나 결코 아버지를 죽일 수 없는 수많은 젊은 남성들이 장차 어떤 삶을 살게 될지, 정신학적으로나 사회학적인 측면에서 진지하게 예측하고 대비해야할 일이다. 


라틴어 'Ad Astra'는 Ad astra per aspera의 줄임말이다. 모든 역경을 헤치고 별로 향해 나간다는 뜻이다. 그리스-로마 신화속 수많은 영웅들이 죽어서 별이 된다. 영화 시나리오를 쓴 사람은 누가 별이 될 거라고 생각했을까? 가족을 버리고 자신의 꿈을 좇은 아버지 맥브라이드? 아니면 자신의 소중한 지구를 지키고 마침내 고향별로 돌아간 아들 맥브라이드? 



* 아무리 화성 중력이 지구의 30%에 지나지 않는다지만 대신 행성반지름도 작아서 탈출속도는 10% 정도밖에 차이 나지 않는다. 


**물리학적으로 정확하게 기술된 콘텐트는 보통 이렇게 생겼다.

 https://www.amazon.com/dp/111823071X/ref=dp-kindle-redirect?_encoding=UTF8&btkr=1)   


***제우스의 아버지인 크로노스는 ‘시간’의 화신이다. 크로노스 역시 자신의 아버지인 우라누스를 거세시켰다고 알려졌다. 그리스신화의 부친살해 사건에 대해서는 구구하고 흥미로운 해석이 많이 있다. 크로노스는 아들 하나에게 죽임 당하리라는 저주를 피하기 위해 아내 레아가 자식을 낳는 족족 다 삼켜버렸다. 레아는 막내인 제우스를 몰래 숨겨 키웠고, 장성한 제우스는 아버지 크로노스의 뱃속에서 형제들을 구해낸다. 개인적으로 제우스의 부친살해는 시간에 관한 한 유한할 수밖에 없는 인간존재가 타인의 기억 속에 살아남아 시간을 이기는 불멸의 존재로 거듭나는 것을 은유한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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