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nguage barriers, 혹은 신의 저주
외국에서 교육을 받기는커녕 보름 이상 체류해 본 적이 없는 50대 여자가 아무 준비도 없이 별안간 미국에 혼자 와서 살다 보니 가끔 울컥할 때가 있다. 다 큰 아들과 두고 온 식구들이 보고 싶을 때를 제외하면 거의 100% 내가 멍청하단 생각이 들어서다.
난 사실 표준 한국인치고도 한국말을 잘하는 편이었다. 발음이나 발성 얘기가 아니다. 어휘나 문장력 얘기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 앞에 서도 떨지 않고 할 말 다 하고, 프레젠테이션하다 별안간 슬라이드가 뜨지 않아도 농담 따먹으면서 대기하는 사람들 지루하지 않게 해 줄 만큼의 한국어 능력이 내겐 있었다.
그런데 미국에 와서 살기 시작한 지 2년이나 됐는데, 아직도 거의 매일 나 자신이 한정치산자처럼 여겨진다. 아무리 지식이 있으면 뭐 하나. 그게 다 한국말로 저장돼 있는데.
특히나 좀 '철학적'이거나 '인문학적'인 어휘는 설사 보고 뜻을 알더라도 구사하려고 하면 얼른 생각이 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심지어 심하면 하루에도 몇 개씩 생소한 어휘와 부딪힌다. 오늘도 평화롭게 신문 보다가 별안간 이 단어 'endorheic'가 나타나면서 내 마음에 파문을 일으켰다. 으아아 난 왜 이렇게 무식하지! 대한민국에서 학교 다닐 때 지리를 잘했으면 뭐 하냐고. 언어가 영어로 바뀌는 순간 그냥 병 1 신 되는데.
안 되면 조상 탓이라며? 이건 바벨탑을 쌓아 언어를 뒤죽박죽 혼돈 상태로 만든 고대인 탓이 아닌가 잠깐 생각해 봤다. 아닌 게 아니라 제이럿 다이아몬드에 의하면 본래 네안데르탈인의 DNA를 많이 갖고 있던 토착 유럽어는 약 1만여 년 전 유라시아 중원에서 유럽을 침범한 종족들에 의해 사라졌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이 본래 갖고 있던 진짜 유럽언어의 흔적은 바스크 어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비신학적이고 개인적이고 무식한 상상일지 몰라도, 문득 바벨탑의 이야기는 본래 페르시아 지역 토착민들의 언어가 사라진 과정을 어렴풋한 기억에 의지해 기록한 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상당한 '고층 건물' 즉 바벨탑을 쌓을 수 있을 만큼 발달된 기술을 갖고 있던 '토착민'들의 언어가 중앙아시아에서 몰려와 대량학살을 행한 인류에 의해 파괴됐던 게 아닐까? 그리고 그들이 구사하던 언어는 완전히 새로운 유라시아계 언어로 대체된 상황을 묘사한 게 아닐까? 흔히 우리가 신의 언어를 잊었다고 하는데 혹시 그에 대한 기억이 아닐까?
2020년 5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