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루프에서 심기일전

by 김민희

카페인은 고약한 불청객이다. 말똥말똥, 감은 두 눈 속에서 빅뱅이 일어나고 과거와 현재의 플래시가 쉴새 없이 터진다. 쉰의 불안이 머릿속을 노크한다. 준비되지도, 원하지도 않은 ‘나는 누구, 여긴 어디’라는 질문으로 어안이 벙벙하다. 도대체 나의 몸의 사령탑이 분명한데 정체불명의 손님 같은 전두엽이 무슨 꿍꿍인지 궁금하다. 기미도 없이, 어떤 연상작용도 없이 불쑥, 잊고 싶고 삭제하고 싶은 시간이 내 눈 앞에 펼쳐지는 작동 원리를 설명받고 싶다.


몰랐다. 학창 시절 ‘시험 친다’가 인생 예행연습일 줄. 심기일전했지만 얻지 못한 점수에 세상이 나를 우롱하는 거냐고 구시렁대기도 했다. 부모덕에 과외받아 수월한 인생을 보며, 자괴감으로 억울함으로 욕을 했다. 타고난 명석함은 신이 준 선물 같아서 부러울 뿐이었다. 뜻대로 되지 않는 걸림돌에, 자꾸 곁눈질로 내가 가고 싶었던 길을 힐끔대다가 미련의 눈물만 흘리기도 했다.

삭제할 수 있다면 수정할 수 있다면 인생 그래프 어느 지점으로 돌아가면 좋을까. 회귀한다면 죽어라 공부할까. 무슨 소설을 쓴다고, 만화를 그린다고. 꿈꾸지 말아야 했을까. 착실하게 직장 다니고 보험 들고 연금 들어서 착실한 남자와 결혼해서 착실한 인생을 살아야 했을까. 내 인생이 달라졌을까? 그랬다면 뒤늦은 고민과 의문에 잠과의 사투를 벌이는 고된 밤은 없었을까. 모범적이고 안정적인 평범한 삶을 갖게 되었을까. 그렇다면 잠 못 드는 밤, 아니야 그때 글을 써야 했어, 이런 무미건조한 삶을 원한 게 아니야, 절규하고 있을까. 역사에 이프(if)가 없다는데 하물며 개인사야.


모범답안 같은 삶을 타고난 내 성정이 감당할 수 있을까. 다시 태어나도 비슷한 길을 선택하고 버텼을 거라고 확신한다. 과거를 반추할 뿐, ‘이프(if)’는 애당초 어불성설이다. 내 인생이 반복되는 듯한 착각은 결국 갈림길에서 선택하고 결정한 당사자가 바로 ‘나’이기 때문일 테다. 밤샘 후 치른 중간고사의 결과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시험지에 문제가 있든 공부한 만큼 얻지 못한 결과에 억울하든 운 좋게 찍은 번호가 걸려들었든 내 시험이다. 타임루프에서 형벌을 올리고 있는 시시포스처럼 바위의 무게는 오롯이 내 몫이다.


타임루프에서 벗어날 방법은 뒤늦게나마 무서워서 게을러서 일부러 회피했던 문을 열어보는 것이다. 그리고 해 보는 것, 아니면 말고, 어때서. 관념은 갖고 싶었던 홀로그램을 손에 쥐지 못하는 순간부터 허무에 고스란히 포박당한다. 어릴 적 상상의 세계 속 공주도 귀족도 수퍼히어로도 베스트셀러 작가도 신데렐라의 행운도 모두 나와는 상관없었다. 시시포스의 후예. 내 삶의 무게는 내가 책임져야 하는, 허무를 이겨내고 노동의 고단함을 받아들인다. 고귀한 성인의 발뒤꿈치도 따라가지 못하는 나는 내 가족, 부모 형제, 친구의 행복에만 진심인 이기주의자다. 내가 행복해야 세상의 행복에도 신경 쓸 수 있는 거라고 믿는다.


다음 타임루프에선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는 내 의지에 달렸다. 우선 문을 열어야 한다. 신발을 신고 떨어진 벚꽃의 길을 밟으며 다음 봄은 화려해야지, 내 인생에 화양연화가 한 번쯤은 있어야지 다시 한번 심기일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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