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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향 Jun 06. 2018

여행하며 성장하는 아이

9. 아기 둘과 제주

  첫째 율이를 낳고 8개월 만인 2016년 6월, 우리는 장장 14시간이 걸리는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주변사람들 모두가 "왜 굳이 먼 미국까지 가 고생을 사서 하느냐."고 하거나 "아이가 여행을 기억은 하겠냐."며 만류했지만 내가 여행을 결심한 건 두 가지 이유였다.


  하나는 지금이 아니면 언제 여행을 갈 수 있을지, 우리 인생은 너무나 불확실하다는 것. 실제 당시 9일간의 여행에 700만 원가량의 경비를 썼는데 지금 상황으로선 경제적인 이유로 이런 큰돈이 드는 여행을 가기가 힘들어졌고 앞으로 몇년 동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른 하나는 아이도 어른과 똑같이 새로운 여행, 낯선 풍경을 보며 즐거워하고 추억을 쌓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어른들은 아이가 어린 시절을 기억 못한다고 믿고 나 역시 그랬지만 행복한 경험은 아이 정서와 성격 형성에 미치는 영향이 분명히 있는 것 같다.


  그래서 2년 전 그렇게 고생하고도 우리는 다시 둘째 솔이까지 네 식구가 제주도를 여행하기로 했다. 14시간 비행에 비하면 이번 50분 비행은 식은 죽 먹기지만 그래도 아이 둘을 데리고 하는 여행이라 걱정이 안되는 건 아니었다.


  남편과 번갈아 아이를 안으면 됐던 2년 전과 달리 각자 한 명의 아이를 안아야 해 여행 5일 내내 어깨, 팔다리, 허리 근육통에 시달렸다.

  여행을 온전히 즐기기는커녕 고생만 하다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이번 여행이 너무 좋았던 것은 아이들과 온종일 함께하며 모든 사물에 반응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다는 감동 그 자체였다.



  첫날 간 해변 모래사장에서 율이는 꽃게를 발견했다. "율아, 꽃게 좀 봐!"라고 하니 율이는 흥분해서 "와! 꽃게 안뇽!"이라고 말했다. 시간이 가는지도 모를 정도로 꽃게를 유심히 관찰하던 율이는 내가 만지려고 하자 화들짝 놀라며 "엄마, 꽃게 아파. 하지 마. 가자."라며 내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율이가 꽃게를 좋아하는지 몰랐던 데다 꽃게를 만지면 아플 거라고 걱정하는 모습이 가슴 뭉클했던 순간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은 여행이 끝난 후 시작됐다.



  집에 돌아온 율이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꽃게가 커졌어요." "꽃게가 아파요." "엉엉." "율이는 울었어요."라는 말을 반복했다. 처음에는 아이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몰라 어리둥절하다가 그 뜻을 알아차리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잊고 있던 '미소게'.

  율이가 작년 어린이집에서 '해맑은미소반'일 때 반 아이들이 '미소게'라는 이름의 꽃게를 키웠다. 선생님이 보내준 사진에는 율이가 꽃게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관찰하던 모습이 여러 번 있었다.

  그 미소게가 아파서, 율이가 슬펐던 걸까.


  다음날 어린이집 등원길에 선생님께 "작년에 키우던 미소게는 어떻게 됐나요?"라고 물으니 선생님은 당황하며 미소게가 죽은 사실을 알려줬다. 율이에게 있었던 일을 설명드렸을 때는 선생님이 더 놀라서 "아주 오래전인데 율이가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어요."라고 했다.


  그 일은 지금까지도 충격이고 아이에게는 얼마큼 더 충격적이었기에 지금까지 기억하는지 마음이 아팠다. 무엇보다 아이가 말을 못하던 시절 겪은 일을 기억하고 표현이 가능해진 때가 돼서야 다시 끄집어냈다는 사실이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동안 아이에게 화낸 일, 부부싸움하는 모습을 보여준 일, 우는 아이를 방치한 일 등등. 이런 순간들이 떠올라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다는 절망적인 기분이 들었다.


  또 한가지 새로운 발견은 율이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많이 성장해있다는 사실을 여행을 통해 알게 된 것이다. 언어 발달이 느린 율이와 퇴근 후 몇시간 동안 나누는 대화는 늘 같은 단어들뿐이었는데 낚시와 목장 체험 등을 하면서는 "물고기야" "토끼야"라고 하고 기쁨이나 슬픔도 평소보다 더 잘 표현하는 아이가 정말 신기했다.



  아이들은 먼 곳 제주도가 아닌 집 앞 공원이나 놀이터라도 엄마 아빠와 함께하는 것이 여행이고 행복한 추억이다. 하지만 이번 여행을 통해 얻은 큰 선물같은 우리의 추억은 내년 휴가까지 나를 버티게 하는 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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