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3. 김장하는 날

by 노향

어제 저녁 시집에서 김장을 했다. 불금 저녁 늦은 회의에 야근까지 하고 지옥철에 몸을 싣고 오는 도중 남편에게 "김장 하러 시집으로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순간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원래 계획으로는 다음날인 토요일 아침 약속이 돼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나 사정이 생겼겠지만 녹초가 된 몸을 시집으로 옮기려니 발이 무거웠다.


결혼하고 두번째로 맞는 김장은 나에겐 어려운 숙제같은 것이다. 결혼 전 배추 구경은 커녕 배추와 무만 구분할 수 있을 정도였다.

시어머니는 며느리들에게 너그러운 분이지만 속마음은 어떤지 알 길이 없다. 더구나 손위 형님은 출근 전 아이 셋을 등교시키고 퇴근해선 집밥과 설거지, 청소, 빨래까지 해내는 모든 워킹맘의 적이라 늘 나와는 비교 대상이다.


나는 신혼초부터 시어머니께 잘보이려고 애쓰지 않았고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노력했으므로 못마땅하셨겠지만 가끔은 사소한 말이나 행동에 감동받는 일도 많았다. 이를테면 안부전화 한통에 고마워하는 등이다.

어제도 김장하러 몇시에 가야 할지 여쭤보려고 연락을 드리니 "네가 할 줄 아는 게 뭐가 있느냐."며 "호호호~" 웃으셨다. 퉁명스러워 보이지만 기쁜 마음을 표현하는 시어머니의 방식이다.


피곤한 몸을 추스르며 김장을 마쳤지만 보람도 있었다. 평소 무뚝뚝하신 시어머니가 모처럼 기분이 좋아보였고 남편도 "수고했어. 사랑해."라며 뜬금없는 사랑 고백을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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