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산은 혼자였지만, 끝엔 니가 있었다
36주 2일, 나는 아들을 만났다
입덧은 남들처럼 못 먹는 게 아니었다.
나는, 계속 먹어야만 견딜 수 있었다.
입만 열면 뭔가를 넣어야 속이 가라앉았고,
그렇게 체중은 100kg에 가까워졌다.
부종, 임신성 당뇨, 그리고 조산 위험까지.
몸은 두 배가 되었고, 걱정도 두 배였다.
아침마다 유산 방지를 위한 좌약을 넣는 것도,
몸에 힘을 주지 않으려 조심조심 움직이는 것도
하루 10시간 넘게 서서 일하는 와중에 다 내 몫이었다.
20대 후반에 자궁경부암을 겪었던 나는
매 순간이 불안했고,
출산이 아닌 유산을 먼저 떠올렸다.
그래서 아이가 뱃속에 머물러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나라에서 주는 임신 지원금 100만 원은
몇 번 병원에 다녀오면 금방 사라졌고
2주마다 가야 하는 정기검진은 당연한 일정이 되었다.
그리고 어느 날,
‘아이가 흘러내릴 수 있다’며
‘맥도날드 수술’을 권유받았다.
아이 나오는 길, 자궁경부 입구를 묶는 수술.
출산의 경로를 잠시 봉인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버텼다. "딱 한 달만 쉬고 출산하자."
그 계획은 허무하게 무너졌다.
아들은 36주 2일, 조금 일찍, 나를 찾아왔다.
양수가 터졌고, 나는 대학병원 분만실로 향했다.
그 순간만 해도, 이 아이는 설마 금방 나오겠지 싶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23시간 반의 진통으로 깨졌다.
7시간쯤 지났을 때, 나는 절박하게 말했다.
“제왕절개 해주세요… 제발, 못 버티겠어요.”
하지만 돌아온 말은 이랬다.
“아직 괜찮아요. 자연분만해야죠.”
그리고 정확히 23시간이 지나고서야
“이제 수술합시다.”
그 순간, 정말 욕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내 입에선 아무 말도 나올 수 없었다.
남아있는 힘조차 없었으니까.
그 와중에 숙련된 간호사 한 분이 내 배를 꾹꾹 눌러주지 않았다면,
아들이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을까?
그 손길 덕분에 아들은 태어났다.
하지만… 아기의 머리는 찌그러져 있었다.
골반에 몇 시간이나 끼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보며 가슴이 먹먹했다.
나는, 이 출산을 ‘혼자’ 했다.
적어도 그렇게 느껴졌다.
나중에서야 알게 됐다.
부모님이 ‘그래도 남편인데’라고,
‘아이 아빠로서 감정 한 번은 느껴야 하지 않겠냐’며
그를 병원으로 불렀다는 것을.
하지만 넓은 병원 어딘가에 그가 있다는 것도 몰랐고,
그가 나를 본 건지, 나를 기다렸던 건지조차 나는 끝내 알 수 없었다.
그 흔한 무통주사 한 번 맞지 못했다.
허리는 틀어졌고, 골반은 무너졌다.
나는 쌍팔년도도 아닌 시대에,
쌩으로 23시간 반의 진통을 견뎌냈다.
마침내 아들을 만났을 때,
내게 허락된 시간은 단 몇 초.
“발도장 찍고 신생아실로 갑니다.”
대학병원에서의 출산이라는 이유로
안아볼 수조차 없었다.
“원래 이런 건가…” 그 순간, 출산의 기쁨보다
허탈함과 공허함이 더 크게 밀려왔다.
지금도 그날을 떠올리면 눈이 시큰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고된 시간 끝에 내게 와준 아들은
‘너, 잘 버텼다’는 증표처럼
내 가슴에 선명히 새겨졌다.
출산은 혼자였지만, 끝엔 아들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