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자리는 원래 그의 자리여야 했다
그 자리는 원래 그의 자리여야 했다
임신한 내 옆엔, 남편이 없었다.
회사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진료일마다 그는 자리를 비웠다.
“미팅이 있어서… 출장이라서…”
언제나 그럴듯한 이유는 있었지만, 그 사정은 단 한 번도 나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처음엔 기다렸다.
이번엔 함께 와주겠지. 다음번엔 오겠지.
하지만 그의 자리는 늘 비어 있었고, 그 빈자리를 묵묵히 채운 사람은 다름 아닌 나의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진료 시간에 맞춰 말없이 차를 몰고 왔다.
병원까지 데려다주고, 검진이 끝나면 나와 함께 밥을 먹고
아기 용품도 하나하나 챙겨주셨다.
말로 따뜻함을 표현하진 않으셨지만, 행동 하나하나가 다정했다.
묵묵히, 조용히, 그리고 깊게…
아버지는 그렇게 나를 감싸주셨다.
남편의 자리를 대신해 주는 아버지에게
나는 고맙고, 미안했고, 무엇보다 씁쓸한 마음이 많이 들었다.
처음엔 아버지와 동행하는 산부인과가 참 어색했다.
대기실 의자에 나란히 앉아 있는 부녀 사이.
괜히 주변 눈치를 보게 되었고, 자세를 고쳐 앉으며 시선을 피했다.
그 어색함은, 어느 날 벌어진 해프닝으로 더 또렷해졌다.
진료를 기다리던 중, 익숙한 얼굴이 내 이름을 불렀다.
“어? ○○씨 아니세요? 여긴 무슨 일이세요?”
나는 입덧으로 퉁퉁 부은 얼굴에 억지웃음을 얹고 대답했다.
“네, 임신해서요. 오늘 진료받으러 왔어요.”
그 사람은 주변을 한번 둘러보더니 조심스레 물었다.
“…근데, 저분은 누구세요?”
나는 담담히 말했다.
“아, 제 아버지세요.”
그 순간, 상대의 눈빛이 확 바뀌었다.
‘남편 아닌 누군가’라는 오해가 방금 전까지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애써 감추려 했지만, 이미 다 읽혀버린 그 눈빛.
순간 가슴이 싸늘해졌다.
웃으며 넘겼지만, 마음 어딘가는 텅 비어버렸다.
그 순간, 아버지의 다정함보다 남편의 부재가 더 크게 느껴졌다.
내 옆을 지켜줘야 할 사람은 없었고,
그 자리를 대신한 아버지의 뒷모습은 고맙고 또 미안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너무나 씁쓸했다.
임신은 함께 기뻐하고 설레어할 일이라 믿었는데,
내 임신은 점점 나 혼자 감당해야 하는 일이 되어가고 있었다.
축하와 응원보다는 오해와 눈총이,
배려보다는 빈자리와 해명이 더 많았다.
아버지의 손을 붙잡고 병원을 나오는 길,
나는 마음속으로 자꾸만 묻고 있었다.
“이 사람 없이도 나는 해낼 수 있을까?”
“이렇게 시작한 우리의 아이는, 외롭지 않게 자랄 수 있을까?”
그 물음에 아직 답은 없었지만,
그날도 나는 아버지의 온기 덕분에 무너지지 않고 하루를 견뎠다.
문득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나는 왜 이 사람과 결혼이라는 걸 왜!! 했을까?”
연애할 땐 몰랐다.
결혼은 사랑만으로 되는 게 아니라는 걸,
함께 책임을 나누는 일이라는 걸..
하지만 그에게서 책임이란 말은, 애초에 그의 인생에 존재하지도 않는 단어처럼 느껴졌다..
진료실, 대기실, 그리고 출산 준비까지
늘 아버지가 함께였고,
그것은 점점 당연한 일이 되어가고 있었다.
어느 날 나는 깨달았다.
산부인과에 늘 나란히 앉아 있는 사람이
남편이 아니라 아버지라는 사실이
슬픈 일이 아니라,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는 걸.
그날 이후, 나는 마음속에 하나의 바람을 품게 되었다.
“내 아이에게는 아버지의 사랑을 꼭 보여주고 싶다.”
내가 그렇게 많이 받고 자란 사랑,
그 따뜻한 품을 이 아이도 느낄 수 있게 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아이의 아빠는,
그 사랑의 빈자리를 이미 오래전부터 외면하고 있었다.
결혼이라는 이름의
망망대해를, 임신이라는 좌표 하나 찍고
혼자 항해하는 기분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없었다면,
나는 이 결혼을 끝까지 끝내지 못한 채 '갑'과 '을'사이 어딘가
'병'이나 '정'쯤 되는 위치로 끌려 다니며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