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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mpo Primo Aug 08. 2019

우리 모두는, 나조차도 페스트 환자일지 모른다.

알베르 까뮈의 <페스트>를 읽고

페스트를 제대로 읽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이 책이 그저 재난영화와 같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소재만으로도 너무 극적이지 않은가. 도시 전체를 죽음에 휩싸이게 할 만큼 강력한 질병, 페스트. 이 책의 저자인 알베르 까뮈는 자신의 저작인 <이방인>을 통해서는 ‘부정’을, <페스트>를 통해서는 ‘긍정’을 나타내고자 하려 했다고 하였다. 대체 이 소재를 통해 어떤 긍정을 드러낼 수 있단 말인지 처음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 글은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희곡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작가가 희곡의 앞 부분에서 밑밥을 깔듯(?) 오랑이라는 도시를 기술하고, 그 이후 인물이 하나하나 등장한다. 쥐들의 죽음이 점점 큰 재앙으로 발전해 나가는 과정을 보며 비극은 아주 사소한 일에서 ‘관찰되기’ 시작하여 결국 거대한 하나의 사건으로 마무리되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나비효과처럼 말이다. 이렇듯, 도시 전체로 돌아갔다가, 인물의 서술로 돌아갔다가, 그의 심리상태를 드러내는 시점의 전환 등이 흥미로웠다. 처음엔 이런 시점 전환에 맞춰 책장을 넘겼고, 그렇게 한 장 한 장 읽다 보니, 결국 까뮈는 페스트를 통해 인간이 잊고 있었던 어떤 저항 의식, 인간성, 사랑 같은 소중한 가치관들을 상기시키려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사실 재앙이란 모두가 다 같이 겪는 것이지만 그것이 막상 우리의 머리 위에 떨어지면 여간해서는 믿기 어려운 것이 된다. (중략) 어리석음은 언제나 악착같은 것이다. 만약 사람들이 늘 자기 생각만 하고 있지 않는다면 그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중략) 그들은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믿고 있었지만 재앙이 존재하는 한 그 누구도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는 것이다. (56-57p)


위의 구절이 함축적으로 드러내는 바와 같이 이 글의 주요 인물들이 페스트를 마주하는 방법은 모두 제각각이었다. 의사 리유와 서기인 그랑은 그들의 직업정신을 발휘하여 페스트를 극복하고자 끊임없이 방법을 찾았고, 기자 랑베르는 ‘나는 이곳 사람이 아니다’라고 항변하며 어떻게든 이곳을 떠나려고만 한다. 신부는 이것이 신을 외면한 당신들을 향한 징벌이며, 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라고 역설한다. 타루는 끊임없이 이 안에서 관찰하고 기록하고 사유하며, 코타르는 자살을 시도하기도 하는 등 돌발행동을 한다. 그 이외의 오랑의 시민들은, 그 안에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잊었던 사랑을 다시끔 되찾는다.


개인적으로는 타루가 주변 사람들을 관찰하고 기술하는 방식이나 그의 사고가 제일 흥미로웠다. 그랑이 부인과 결별하게 된 일화가 중간에 잠시 등장하는데, 골자는 이렇다.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하여 살기위해 하던 공부도 그만두고 결국은 일을 시작한다. “결혼하고, 계속해서 또 조금 사랑하고 일을 한다. 사랑한다는 사실을 깜빡 잊어버릴 정도로 일을 한다. (112p)” 그리고 그 과정에서 결국 그랑의 부인인 잔은, 일상의 무게에 눌려 사랑을 잃고 그랑을 떠난다. 갑자기 타루의 사고가 흥미롭다는 이야기를 하다 뜬금없이 그랑의 이혼 이야기로 넘어온 까닭은, 타루의 이야기 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이 이 구절을 다시 상기시켰기 때문이다. 319쪽부터 타루는 아주 긴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이 이야기 중 가장 내 마음에 와닿았던 부분이다.


(전략) 내가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은, 사람은 제각기 자신 속에 페스트를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그 누구도 그 피해를 입지 않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늘 스스로를 살펴야지 자칫 방심하다가는 남의 얼굴에 입김을 뿜어서 병독을 옮겨 주고 맙니다. 자연스러운 것, 그것은 병균입니다. 그 외의 것들, 즉 건강, 청렴, 순결성 등은 결코 멈춰서는 안 될 의지의 소산입니다. (중략) 그렇습니다, 리유. 페스트 환자가 된다는 것은 피곤한 일입니다. 그러나 페스트 환자가 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것은 더욱더 피곤한 일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다 피곤해 보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에는 누구나가 어느정도는 페스트 환자니까요. (329p)


이 구절을 읽으며 느낀 것은, 결국 일상에서 나와 가까이 있는 것들의 소중함을 잊었다면 우리는 모두 페스트 환자가 아닐까, 라는 점이었다. 우리는 종종 일상의 무게에 사랑하는 것을 잊곤 한다. 그리고 무언가 비극적인 일이 일어났을 때, “아, 그게 소중한 거였구나.”라고 깨닫곤 한다. 페스트가 발발하고, 도시가 폐쇄되고 나서야 그 소중함을 깨달은 사람들처럼.



결론적으로, 페스트는 사라졌다. 사람들은 마치 페스트를 이겨낸 것처럼 기뻐하고, 환희를 드러내며, 폭죽을 터뜨린다. 하지만 페스트는 리유나 그랑 같은 인물의 투쟁으로 물리친 것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사라졌다. 그렇지만 다들 대단한 역병을 스스로의 의지와 성실함으로 이겨낸 것처럼 기뻐한다. “인간들은 늘 똑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의 힘이고 순진함이기도 하다.(400p)”


하지만 타루의 말처럼, “사람들은 제각기 자신 속에 페스트를 지니고” 있으며, “누구나가 어느정도는 페스트 환자”이다. 그렇기에 리유는, 이 연대기가 결정적인 승리의 기록이 아님을 시인하며 아래와 같이 글을 마무리한다.



 시내에서 올라오는 환희의 외침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리유는 그러한 환희가 항상 위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 기쁨에 들떠 있는 군중이 모르는 사실, 즉 페스트균은 결코 죽거나 소멸하지 않으며, 그 균은 수십 년간 가구나 옷가지들 속에서 잠자고 있을 수 있고, 방이나 지하실이나 트렁크나 손수건이나 낡은 서류 같은 것들 속에서 꾸준히 살아남아 있다가 아마 언젠가는 인간들에게 불행과 교훈을 가져다주기 위해서 또다시 저 쥐들을 흔들어 깨워서 어느 행복한 도시로 그것들을 몰아넣어 거기서 죽게 할 날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401~402p)



페스트는 아마, 페스트가 아닌 다른 얼굴을 하고 오늘의 소중함을 잃은 나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어떤 경종을 울리기 위해 언제든 찾아올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2019년 8월 트레바리 문고전의 독후감.


마감을 앞두고 급하게 올려서 허접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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