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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HILOPHYSIS Jan 03. 2022

육아라는 육체노동

아기 독재자의 비참한 노예 vs 사랑을 다해 새 생명을 키우고 있는 사람

행복이란 불쾌한 순간을 상쇄하고 남는 여분의 즐거움의 총합이 아니라, 그보다는 개인의 삶을 총체적으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으로 바라보는 데서 온다는 것이다. 행복에는 중요한 인지적, 윤리적 요소가 존재한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아기 독재자의 비참한 노예'로 볼 수도 있고, '사랑을 다해 새 생명을 키우고 있는 사람'으로 간주할 수도 있다. 그 큰 차이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가치체계다.

<사피엔스> 중



6살 아들의 유치원 방학이 끝을 향해 간다. 며칠 전 '육퇴' 후 남편과 나눈 대화가 우리의 방학을 잘 요약해 주는 듯하다.


- 오늘 어땠어? 사랑이 너무 심심해하지는 않았어?

- 쟤는 정말... 노는 데 미친 것 같아.

- ㅋㅋㅋ


우리는 인생은 저렇게, 쟤처럼 살아야 한다며 말하곤 한다. 아들은 유치원에 가는 평일에는 이상하게 늦게 일어나면서 주말이나 방학 혹은 어디 놀러 가는 날은 칼같이 '미라클 모닝'이다. 아무리 놀면서 자란다지만, 아마 아들의 6년 인생 모토는 '놀기 위해 산다'일 것이다. 한 날은 제주도 할머니 집에 가는 비행기를 타야 하니 조금 일찍 일어나야 한다며 자기 전에 일러두었더니, 새벽 2시에 일어나 온 집을 날아다녔다.


해마다 내가 체감하는 육아 강도는 낮아진다. 당연히 2살일 때의 육아는 지금과 비교할 수도 없다. 특히 어렸을 때는 병원에도 자주 갔던 게 제일 힘들었는데, 어른들의 '크면 괜찮다'라는 말이 지금 와서 보니 맞는 말이다. 대신 내 육아 에너지의 최대치는 줄어드는 반면, 아이의 놀이 에너지는 최대치라는 게 없어지고 있다. 놀고 있는데 놀자고 하니 뭘 더 어떻게 놀아야 하나 싶을 때도 있고, 한편으로는 이 아이의 노는 욕구를 내가 충분히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나 싶어 마음이 불편할 때도 있다. 뭐, 그렇다 해도 아이는 혼자 놀거나 엄마 아빠와 놀면서 잘 크고 있다.

 

아들은 나랑 놀 때와 아빠와 놀 때를 구별할 줄 안다. 엄마는 힘이 부족한 걸 알고 나름 엄마를 배려해 주는데, 쏟는 힘 자체가 다르다. 그래도 에너지가 넘치는 아들과 놀다 보면 부딪힐 때가 많은데, 그럴 때 나의 방법은 "깨꼬닥" 소리를 내며 눈 감고 쓰러지는 것이다. 그럼 아들은 내게 다가와 '엄마?' 하며 볼에 뽀뽀를 해주고, 난 일어난다. 좀 세게 '꽝' 한 날은 뽀뽀를 여러 차례 받고 나서야 일어나곤 한다. 오늘도 장난으로 던진 베개에 맞고는 "깨꼬닥" 했는데, 순간 장난기가 발동했다. 아들은 평소대로 뽀뽀해 주었지만, 나는 모르는 척 "너는 누구야?"라고 물었다. 아들은 자기 이름 세 글자를 또박또박 말했다. 난 계속 이름이 기억 안 난다는 시늉을 했고, 몇 살인지, 유치원은 어딜 다니는지와 뭘 좋아하는지를 물었다.


- 넌 뭘 제일 좋아해?

- 엄마, 아빠!


헬로카봇이나 포켓몬스터가 아닌 엄마와 아빠라니!


아들은 이런 식이다. 무심결에 작은 감동을 매일 준다. 아이는 이런 걸 다 기억이나 할까.


차를 타고 가다 한 겨울에도 얇게 입은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들을 보았다. 5명이 자기들끼리 돌아다니는 걸 보며 남편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 크지 않은데도 벌써 저렇게 자기들끼리 어울리며 다니는구나. 우리 아들도 금방이다. 좀 있음 엄마 아빠랑 어디 같이 안 가려고 할 거다. 놀려고도 하지 않을 거다.. 그런 내용이었다. 그 아이들도 누군가의 사랑스러운 아들일 테고, 지금 내 아들처럼 아기 같은 모습이 있었겠지. 아니다, 6살이면 아기도 아니지. 내 눈에는 너무나 아기 같은데. 아마 저 아들들도 부모에겐 너무나 아기일지도 모르겠다. 남편과 나는 그런 남자아이들을 마주칠 때마다 마음이 축 처진다. 육아라는 육체노동의 끝이 오길 바라면서도 오지 않기를 바라는 이상한 마음과 함께.


다시, 아들은 지금을 기억이나 할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좀 욕심 같기도 하다. 나야말로 내 부모가 나에게 건넨 사랑의 표시를 다 기억하진 못하니까. 점점 머리가 커가면서 해야 할 것과 하고 싶은 것들에 둘러싸여 그런 것들을 자꾸 잊어가는 것 같다.


'키워봤자 아무 소용없다'라는 말을 나는 제일 싫어한다. 소용이 있으려고 키우는 것이 아니기에. 그런 나도 은근히 '내가 이 고생을 한 걸 아들이 커서도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이 생기나 보다. 자꾸 '기억, 기억' 하는 걸 보면. 소용 있으려고 키우는 것이 아닌 것처럼, 기억되려고 키우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러니 아들아, 기억을 못 해도 된다.

그 사랑받은 시간이 머리가 아닌 마음에 쌓이기를.


그렇게 오늘도  끼를 차리고 목이 쉬도록 아들과 놀고 씻기고 재운다. 기쁜 소식은 이틀 후에 방학이 끝난다는 . 웃음이 새어 나오는  어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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