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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HILOPHYSIS Jan 11. 2022

육아도 삶도 돌고래처럼

아들이 밥을 가지고 투정할 때면 왜 이렇게 화가 날까.


곧 내년이면 학교에 들어가는데 제일 작을까봐 걱정되어서? 밥투정 자체가 순간 너무 듣기 싫어서? 그 버릇을 고쳐 주고 싶어서? 아니면 그 모든 합?


어떤 날은 '먹기 싫을 수 있지' 하며 넘기지만 오늘은 '좋은 말로 안 된' 것이다. 그대로 화를 내뱉고 나면 늘 손해 보는 건 나다. 온갖 걱정과 후회가 온종일 들러 붙든다.


그 찜찜한 감정을 내려놓고 돌이켜보면, 내가 걱정하는 것은 미래에 대한 상상일 뿐이다. 그저 내버려 두고 커 가는 아이를 믿어주자 마음먹어본다. '지금은 그럴 수도 있구나' 하는 마음만이라도 가져 보는 것이다. 하다못해 미래에 대한 걱정을 표현하는 것으로 끝내기, 그럼 나머진 아이가 할 테니까.

 

생각해 보면 나도 싫은 게 많았다. 싫은 데엔 종종 이유가 없는데, 엄마는 그런 날 유별나게 봤다. 이제 와보니 내가 엄마와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다. 물론 지금은 '엄마 말 들을걸'하는 것도 있는데, 이를테면 '어릴 때 잘 먹을걸' 같은 것. 참 세상에서 어려운 건 균형 같다. '엄마 말 들을걸'과 '나 하고 싶은 대로' 사이의 균형. 그건 이제 엄마와 나 사이가 아닌, 나와 내 자식 사이에서의 줄타기가 되었구나. 그건 육아에서 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이럴 때 필요한 게 내려놓기. 의지를 가지고 노력한다고 다 되는 게 아니니까. 역효과가 날 때도 있고. 오늘 만난 책 <노력의 기쁨과 슬픔(올리비에 푸리올 지음)>은 그런 의미에서 아주 기가 막힌 타이밍에 내게 메시지를 던져 준다.


그저 내려놓고 ‘삶이 스스로 정렬되기를 차분히 기다리는 여유 필요한 나에게. 그런 여유는 편안한 자세에서부터 시작한다고 한다. 편안한 자세로 과도한 생각을 하지 않는 , 그저 내버려 두는 이다.


"우리를 말하고 춤추게 하는 건 의무감이 아니라 우리의 욕망이다"


유능한 다이버는 바다를 대립의 대상이 아니라 애정의 대상으로 바라본다. 그리하여 프리다이빙을 바다에 대항하여 분투하는 과정이 아니라 바다 안의 흐름에 끼어드는 과정으로 여기는 것이다. '숨을 잘 참아야지' 하며 흐르는 시간을 붙잡고 씨름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하지 않고 나 자신이 그 행위 자체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마치 한 마리의 돌고래처럼.


‘아무 노력하지 않고 밀물 때가 들어오면 그와 함께 밀려들고 썰물 때가 오면 빠지면서 뒤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흘러가는 것.’ 그게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이다.


아들이 밥 먹기 싫어하거나 투정 부리는 것을 '오늘은 먹기 싫은 것'으로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나 혼자 과도한 의미를 불어넣었던 건지도 모른다. 아이가 제일 작으면 어떡하지, 면역이 약해지면 어떡하지, 딴 데서도 저럼 어떡하지, 매일 이럼 어떡하지 등등. 그렇게 내가 만들어낸 상상의 의미에 집착했던 건 아닐까.


이는 살면서 부딪히는 모든 생각과도 연결된다. 삶의 문제에 대해 아무리 열심히 생각한들 아무 효과가 없을 수도 있다. 이 책에서 '종업원의 신비'라고 부르는 것에 주목해 보자. 종업원이 "지나가요"를 외치며 자신의 손에 들린 쟁반과 음료에 주의하지 않은 채 앞으로 밀치고 나아가는 모습, 여기서 때때로 어떤 태도가 필요한지에 대한 힌트를 얻는다. 어떨 때는 그냥 가면 된다. 지금 내 손에 여러 가지가 놓여 있지만, 그것에 '집중!' 하여 생각만 열심히 해봤자 나아가지 못한다. 그저 몸을 움직이는 수밖에. 그러다 보면 어느새 닿아야 할 곳에 닿는다.

 

"중요한 것은 생각이 아니라, 삶이 우리에게 길을 알려줄 수 있게끔 그 다양한 면모를 받아들이는 일이다."


그것은 이 책에서 말하듯 육아(삶)에 최선을 다하거나 존재를 닦달하는 것이 아닌 편안함이 이끄는, 긴장 없는 '응시'로써 가능한 것이다. 생각해낸 의미에 집착하지 말고, 차분하게 기다리는 것. 생각 자체를 멈추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자신을 미래에 내던지지 않고서 '야생동물의 평온함'을 얻는 것이다.


또한 어떨 때는 의미에 대해 모를 때가 오히려 나을 수도 있다.


"그 누구도 바이올린이 자신이 연주하는 음악을 이해하리라 기대하지 않는 법이다."


의미 찾아 삼매경인 내게 뒤통수를 친 문장이다.


"아직 무르익지 않았을 때, 즉 때가 아닐 때 결정을 강요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혼자 결정하고 세상에 나의 의지를 관철하려 할 것이 아니라, 한걸음 물러나 세상의 처분을 기다리고 그 소리에 귀 기울이기로 결정해야 한다. 마음을 깨끗이 비우면 행위가 가능해질 것이다."


마음을 비워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인간의 대소사에도 존중해야 할 적절한 시기와 기간이 있는 법"이다. 그 '존중해야 할 적절한 시기와 기간'에 대해 받아들이자고. 육아든 삶이든, 돌고래처럼 그저 그 흐름에 몸을 내맡겨보자고. 생각을 멈추기 전 생각해본다.


이 글을 쓰면서 마음이 차분해짐을 느낀다. 변기 내리듯 쏴하며 비워지진 않더라도, 조금씩 어질러진 마음을 주워 담아 본다.


그리고 내려놓는다.

아이도 나도, 클 때 되면 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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