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있으면 다 언니> 손열음 편
최선도 여러 가지 최선이 있는 법
부끄럽게도 음악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이게 부끄러워할 게 맞는 건지도 잘 모르겠지만. 음악은 내겐 일상의 BGM 같은 것. 그 자체로 영감을 주거나 내게 어떤 무형의 가치를 선사하지는 않는다. 설거지할 때 대중음악을 틀어 놓으면 조금 덜 힘들고, 몸도 가뿐해지는 기분을 느낄 뿐이다. 그럼에도 요즘 아이 등원 후 집에 돌아오자마자 꼭 하는 행동은 클래식 음악부터 켜는 것이다. 블루투스를 켜고 멜론의 클래식 플레이리스트를 랜덤으로 재생하는 일. 나름 독서할 때의 BGM과 집안일할 때의 BGM을 구분하는 정도. 내 일상에서 음악은 내게 딱 그 정도의 의미다.
<멋있으면 다 언니>를 통해 이번에 알게 된 피아니스트 손열음은 그런 음악에 대한 내 마음을 살짝 건드려 주었다. 클래식을 들으면 뭔가 모르게 차분해지고 어쩔 땐 집중도 잘 되는 것 같고, 무엇보다 질리지가 않는다. 그런 나에게 손열음은 음악 자체가 좋아서 피아노를 계속하는 삶을 보여준다. 길지 않은 인터뷰지만, 그 속에 그녀에게 피아노를 연주하는 음악가의 삶이 무엇인지를 짐작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나는 클래식이 궁금해졌다.
손열음은 <하노버에서 온 음악 편지>라는 클래식 에세이도 썼다. 그녀에게 피아노, 예술감독의 기획, 글쓰기 중 가장 통제하기 좋은 것은 글쓰기다. 딱 노력한 만큼 나온다고. 대신 예술감독으로서의 일은 책임감을 가지고 사회적 자아를 만나는 일이며, 피아노는 그저 자신의 삶 그 자체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은 곧 자신의 '언어이자 발산이고 이완'이라고 하는 그녀.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그걸 온전히 느낄까 싶다가도 '누구에게나 그런 순간은 종종 오지 않나' 하고 생각해 본다. 나는 언제 나를 표현한다고 느끼는지, 언제 진정으로 발산하는지, 또 어떨 때 이완됨을 느끼는지 일기장에 쭉 적어가 본다. '나도 있구나?' 별것 아닌 일상 속에서도 예술가들이 느끼는 희열을 느끼고 있다. 다만, 그걸 내 언어이자 발산이고 이완이라고 표현하지 않을 뿐.
무엇보다, 최선을 다하는 방식에도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음을 배운다. 항상 모든 것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일 필요가 없음도. 우리는 늘 "모든 것에 최선을 다해. 그럼 길이 열릴 거야" 같은 주문을 듣고 살진 않았나. 피아노를 칠 때 그녀는 그저 재미있어서 계속한다. 규칙적으로 하루에 몇 시간, 이런 식으로 계산하지도 않았다. 어렸을 때는 일기장에 '피아노 그만두고 싶다'라고 할 정도로 힘든 적도 있었지만, 계속하게 해 준 것은 바로 음악 그 자체다. 연주회 전에는 딱 49%만 준비한다고. 어차피 100% 한다고 그대로 결과로 나오는 것이 아닌 영역임을 알기에. 황선우의 글처럼 "사람의 노력 뒤에 여백이 존재함"을 받아들이기에. 대신 예술감독 일은 혼자 하는 일이 아니며, 다른 이들의 일과도 연결되어 있어 책임감을 필요로 한다고. 그래서 '여태껏 살아오며 이토록 최선을 다한 적은 없다'라고 말할 만큼 준비하는 것이 최선이다. 그러니 피아노를 치는 일에서의 최선과 예술감독으로서 연주회를 기획하는 일에서의 최선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최선도 여러 가지 최선이 있는 법.
쿨하다기보다는 그게 저는 좀 이해가 안 가요.
클래식이 대접을 받는 것은 제가 봤을 때 근본 없는 거예요. 100년도 안 된 문화죠, 사실.
모차르트 시대 기록을 봐도
요즘 가수들이 고음 내지르면 박수치고 환호하는 것처럼 피아노 속주에 그런 식으로 반응했어요.
<멋있으면 다 언니> 손열음 인터뷰 중
그렇지. 클래식 음악도 그저 있는 그대로 즐기면 되는 것인데. 덕분에 정말로 궁금해졌다. 베토벤이고 모차르트고 뭐 하던 사람인지, 그 음악은 왜 수백 년 후에도 살아남는지, 음악이 정말 언어라면 그들은 뭘 말하고 싶었는지, 하는 것들 말이다. 그녀의 바람은 "클래식 음악에 대한 편견도 없고 그렇다고 해박하지도 않은, 그야말로 일반인이 봤을 때도 흥미로운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도록 전달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 적어도 나에게는 그 바람이 그대로 통했다.
일단 시작은 손열음의 클래식 에세이로 해볼까.
아무튼, 이 언니도 멋지다.
닮고 싶고 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