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만의 고유함으로 피어나는 일

by PHILOPHYSIS

그저 퐁퐁 솟아나는 여느 새순인 줄로만 알았다. 보통 새순은 그 색이 옅기도 해, '이번 새순은 유난히 색이 옅네' 했다. 왔다 갔다 한 번씩 눈길을 주고는 관심 밖이었던 이 식물의 이름은 스파티필름 밀키웨이. 오늘에서야 새순이 아닌 꽃봉오리임을 알고는 연신 사진을 찍었다. 





스파티필름 하면 나는 그 어두컴컴하고 답답한 회색빛 정부 청사 공간이 떠오른다. 늘 식물이 있지만, 식물에 대해 눈길을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그곳. 그 와중에 유난히 파릇한 식물은 스파티필름. 자연의 햇볕 한 줄기도 들지 않는 형광등 아래 스파티필름은 어찌 그리 청량한 지, 흡사 가짜 같기도 해 지나가다 한 번씩 매만져 보았다. 손끝에 느껴지는 그 촉촉하고 여린 촉감, ‘너 살아 있는 거 맞구나?’



그렇게 실내공간에서 유달리 자주 보는 식물, 스파티필름은 신기하리만치 빛이 들지 않는 곳에서도 꿋꿋하게 살아 있다. 마치 그런 환경 따위는 연연하지 않는다는 듯. 



그러다 스파티필름 밀키웨이라는 식물을 알게 됐다. 한 식물 가게에 대충 찍은 내 사진 속 한 식물의 자태에 계속 눈이 갔다. 식물 가게 사장님에게 다시 문의를 했다. 그다음 날 내 품에 안겨 우리 집에 오게 된 스파티필름 밀키웨이.



이 친구 잎의 무늬는 그 이름처럼 은하수를 떠오르게 한다. 특히 그 특유의 차분하고 어두운 초록빛 바탕색에 콕콕 박힌 별은 한 방향으로 뻗어 나가, 야간 촬영을 한 별의 자취 같기도 하다. 내가 이 식물을 특히 좋아하는 가장 단순한 이유다. 



습도가 높은 것을 좋아하는 터라 이미 잎 끝이 조금 타서 왔지만, 애정을 담아(?) 내버려 두듯 키웠다. 역시 식물에게 애정을 준다는 것은 좀 내버려 두는 것이다. 사람이든 식물이든 과잉보호는 되려 독이다. 그러한 애정 덕분인지 새순을 연달아 뽑아내던 밀키웨이는 결국 이토록 아름다운 꽃봉오리를 올려 준 것이다. 





참 신기했다. 그 흔한 스파티필름을 보고 아무 느낌이 없었는데 말이다. 꽃이나 새순이나 그 자연의 활동이긴 매한가지인데 말이다. 왜 사람은 꽃을 맺었을 때 이리 더 흥분하게 되는 것인지. 새순도 아름답지만, 꽃의 봉오리가 주는 아름다움은 좀 남다른 데가 있다.



너무 예뻐서 그 망울을 톡 터뜨리거나, 구태여 활짝 펼쳐 그 안을 들여다보고 싶은 유혹이 들 정도로.






주얼리를 만든 것을 가지고 이리저리 가지고 논다. 물리적으로 가지고 논다는 의미도 있지만, 그걸로 이리저리 시험해 본다는 의미도 있다. 특히 그것에 대한 내 애정을 시험해 보는 데에 의미가 가장 크다. 그 과정에서 나라는 사람은 사소한 무언가라도 창조해 내는데 큰 가치를 느낀다는 점을 확인하곤 한다.



크게는 내가 낳은 자식(이것은 신의 창조라 할 만하지만)에서 내가 남긴 모든 형태의 글, 따뜻한 요리, 누군가에게 작게나마 준 도움, 식물을 심는 것, 어떤 이미지, 금속으로 만든 주얼리까지. 만들어서 뿌듯함을 느끼지 않고서야 어디서 재미를 찾을까 싶을 정도로 그 본능적인 이끌림을 꾸준히 발견하며 지내는 중이다. 




그러다 아주 가끔, 내가 올린 사진들 아래 혹은 메시지로 감사한 문의가 날아온다. "혹시 구매 가능할까요?" 그런 말을 들을 때면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아무리 자존감이 높은 나라도, 아직 거기까지 이르지는 못했다는 점은 분명히 알고 있다. 미흡한 점도, 배울 것도 너무나 많은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인간인지라 마음속 한편에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아니… 작게 시작해 볼 수 있는 거잖아, 딱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1과 2만 만들어 팔면서 시작해 볼 수도 있는 거잖아. 빨리 나를 보여주고 싶어. 그리고 그 반응을 아는 것 역시 유익할 것 같고’ 등등.



그런 생각들이 새싹처럼 자랄 때마다 나는 단호하게 싹둑 자른다. 마음이 급해도, 그건 내가 당초에 생각한 나의 중심과는 조금은 거리가 있는 것 같아서.



A라는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사실 수많은 경우의 수가 있다. 요즘은 그 수많은 경우의 수를 먼저 지나간 이들을 통해 관찰한다. ‘이런 방법으로 갈 수도 있네, 멋지다, 처음에는 저렇게 시작했구나, 아니 여기 이렇게나 멋지게 변했다고?’ 요즘 그런 것들을 하나씩 수집해간다.



그렇게 수집한 것들은 이전처럼 내 보석함에 쌓이는 건 아니다. 그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지만, 나만큼은 안다. 내 머릿속 함에 하나씩 쌓아갈수록 소비만을 할 때처럼 쉽게 그 욕구가 녹아버리는 것과 달리 그 속에 또 다른 자리가 생긴다. ‘아 그럼 이건 뭐지? 여긴 어떻게 했을까? 오, 나도 이거 배워 보고 싶다’ 하면서 내 함의 너비와 폭은 넓어지고, 그에 따라 내가 부족한 부분이 얼마나 큰가도 오롯이 보게 된다. 






성격이 급한 나로서는 스파티필름 밀키웨이의 봉오리를 파헤쳐 손으로 활짝 펼쳐 보고 싶다. 지금 당장. 그러고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 이렇게 아름답노라고.





그런데, 세상 일이 어디 그렇던가. 모든 일에는 순리가 있고 때로는 기다림이 필요하다. 어느 정도 조직이 차올라야 봉오리가 활짝 펴지듯이, 모든 일이 그러한 것 아닐까. 더 끌어올리고 영양분을 조직에 쌓아가며 하나씩 차근차근 펼쳐 나가면 되듯 말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 날 아침, 눈부시게 활짝 펴 있는 꽃을 보며 감탄하는 날이 올 것이다. 고유함으로 피어나는 일은 사실 그토록 자연스러운 일인 것이다. ‘야 요만큼만 펴보자’ 하며 옆에서 “무브무브” 외친다고 되는 게 아니듯.



그러나 자기만의 고유함으로 피어나는 일은 아무도 대신해줄 수 없는 점에서만큼은 공평하게 느껴진다. 자연의 식물마저도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스스로 끌어다 쓰며, 꽃을 피워내는 일에 도움을 구하는 일 따위는 결코 하지 않는다. 사람 역시 그러하다. 사랑하는 이도, 그 일만큼은 대신해줄 수 없는 것이다.



자기만의 고유함을 알아 가는 것도, 그 고유함을 더 차오르게 하여 피어나는 것도, 모두 각자의 숙제이고 그것은 살면서 이뤄내야 할 매우 가치 있는 일 중 하나이다. 그 후에는 물만 잘 주면, 그리고 시간이 멈추지 않는 이상은, 활짝 피어나는 날이라야 올 수밖에 없다.



그리고, 누구나 그런 시간을 맞이하지 못하리란 법은 없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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