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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HILOPHYSIS Jul 17. 2022

제 아들은 식도가 막힌 채 태어났습니다

식도 폐쇄증. 의사도 몰랐죠. 의사는 항상 검진을 갈 때마다 순산할 거라며, 모든 것이 좋다고 했습니다. 덕분에 편안한 임신 기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양수가 터지고 자궁문은 너무 천천히 열려 제왕절개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저는 '아, 순산은 무슨' 하며 코웃음을 쳤죠. 그러고 마취가 잘 안 된 사례를 많이 본 터라 불안해하며 간호사에게 "마취 안 풀리게 잘해주세요" 했더니 간호사가 "수술 다 끝났어요" 하더라고요. 바퀴 침대에 달달달 실려 가는 느낌은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비몽사몽 병실에서 깼더니 남편이 표정이 좋지 않았습니다. "나 잠깐 다른 병원 갔다 올게.”



불길했어요. 그 후의 일들은 제 기억에 남은 게 없습니다. 조리원 천국, 그런 거 저는 경험해 보질 못했고요. 그때는 제 인생에서 가장 사라지고 싶은 순간이었습니다. 더 자세히 말할 필요도 없이, 남들에겐 천국인 조리원이 저에겐 감옥 같았습니다.



갓 태어난 아들은 다행히 수술이 잘 되었고, 신생아 중환자실에 열흘 입원했습니다. 남편은 점심시간마다 아들을 면회 갔고 저는 매일 카톡 녹음 기능을 이용해 제 목소리를 담아 남편에게 보냈어요. 면회 가서 하는 일은 의료진의 설명 듣기, 아들에게 우리 목소리 들려주기였습니다.



저는 그때 조리원 방 안에서 2시간 간격으로 울었던 것 같아요. 산후우울증이 오지 않으려야 오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지금 생각해 보니 열흘이 굉장히 짧아서 당황스럽습니다만, 그때는 온갖 생각들로 인해 열흘이 고통스러운 십 년과도 같았습니다. 그때 이야길 하면 끝도 없는데요, 큰 재해를 입은 사람처럼 느껴졌어요. ‘왜 우리에게 이런 일이…’, ‘내가 뭔가 잘못한 게 있나?’ 뭔가 노력으로 되지 않는 일들이 한꺼번에 겹치니 힘든 시기였습니다.



아들의 식도는 잘 수술되어 정상적인 위치에 자리 잡았습니다. 그리고 그 열흘간 제가 상상하던 일들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가령, 밥을 먹는데 문제가 있으면 어쩌지 하는 것들요. 대신 근육으로 이루어진 식도는 수술로 인해 모유나 분유가 조금씩 역류했는지, 아들은 흡인성 폐렴으로 시작해 바이러스 폐렴까지 호흡기 질환에 취약해졌습니다. 병원생활이 여러 번 반복되었습니다.



병원도 몇 번을 옮기고 지금은 집 앞 대학병원에 두 달에 한 번 꼴로 진료를 받고 있습니다. 어릴 때는 말도 못 해요. 다른 애들이 콧물 찔끔 일 때 저희 아이는 그냥 바로 입원행입니다. 그래서 어린이집 다닐 때도 콧물 흘리는 애들만 보면 저는 덜덜 떨었어요.



그 끔찍한 병원에 또 갈 수도 있다는 공포. 저도 간호사였지만, 간호사들이 얼마나 힘들 게 일하는지 보다 그 당시 저희 아이에게 제대로 된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으면 그저 달려들었어요. 예를 들어, 수액 라인이 끊어져 바닥에 떨어져 끝이 닿았는데, 그걸 그대로 다시 연결하더라고요. (오 마이 갓,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수액 세트 전체를 바꿔야 해요.) 뭐 그 이상의 일들 수없이 있었습니다. 저는 이제 병원이라 하면 약간의 트라우마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시절 저를 버티게 한 것들은 의외로 단순한 것들이었습니다.



아이의 웃음(특히나 미소가 예쁜 아들입니다), 시댁의 말 한마디(우리 희선이 고생했네, 너라서 가능한 거다), 남편의 말 한마디(내가 할게, 고생했어, 고마워), 친정 부모님의 그저 옆에 있어주는 시간(아무 말 필요 없죠), 동생네 부부가 만든 샌드위치(그저 따뜻합니다), 아이의 낮잠 동안 만난 책 속 한 줄(세상 지혜로운 이들의 말씀들), 바닐라라테 한 잔(달달하고 기분 좋아지는 한 모금), 의사의 말 한마디(내일 퇴원할게요), 뭐 그런 것들요. 막상 써보니 제법 되네요.



그리고 또 있는데요. 그 당시 저는 판도라 주얼리 마니아였어요. 우울할 때, 그 우울한 제 모습을 만나기 싫을 때 저는 거기 매몰되기보다 차라리 벗어나고자 했던 것 같아요. 모르는 척하는 방법. 그래서 아들은 병실에 있는데, 판도라 검색하며 종종 쇼핑도 하는 제 자신이 굉장히 낯설게 느껴졌죠.



어떤 때는 아들이 퇴원하자마자 백화점에 가서 판도라를 산 적도 있었어요. 그런 제 자신이 기이하게 느껴져 싫은 것도 같았어요. 그런데 뭘 어쩌겠어요. 그럼 병실에 앉아 펑펑 울겠습니까. 그것보다는 차라리 좋아하는 것들을 끊임없이 찾는 게 나은 것 같았어요. 지나고 보니 아들에게도 그게 훨씬 나은 선택이었습니다. 그냥 저는 그랬어요. 그 작고 반짝이는 것들이 숨 쉴 겨를을 주더라고요.



오래된 말처럼, 모든 것은 지나갑니다. 정말로 그렇더라고요. 아들은 지금 무지 건강합니다. 밥은 저보다 많이 먹고요. 취나물, 미나리, 참조기에서 청국장, 스테이크, 치킨 등등 가리는 것도 습니다.



물론 기침은 만성이 되었습니다. 매일 밤 네뷸라이저로 호흡기 치료를 10분 정도 해요. 가끔 자다가 기침하며 깨고 어쩔 땐 토도 하고요. 그래도 이젠 컸다고 열도 거의 안 나고, 난다 해도 하루 뜨끈하고 말아요. 병실 안 가본 지도 오래되었어요. 그냥 감사합니다.



아들은 밥을 먹을 때마다 책을 보려고 해요. 저는 말립니다. 너한테 제일 중요한 건 밥이다. 밥 먹는 것에 집중하라며, 제가 생각해도 웃긴 잔소리를 하게 해요. 밥심으로 큰 아들은 점점 면역도 좋아지고 또래보다 작지만 꾸준히 크고 있어요. 운동도 좋아해서 정말 감사한 마음이에요.



겨우 몇 해 전에야 저는 아들의 건강에 대해 조금 초연해질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남들처럼, 열나네, 콧물이 좀 나네, 그 정도로요. 그래서 식물도 돌볼 여유가 생기고, 제 일에 대한 고민도 마음껏(?) 할 수 있고요, 주얼리도 ‘길티 플레저’가 아닌 온전한 ‘플레저’로써 즐길 수 있게 되었고요.



그렇게 저 나름의 힘든 시기를 보내고 나니, 어느 정도 힘들어도 지나갈 것임을 경험적으로는 알게 된 것 같아요. 그래도 힘든 것은 힘들죠. 겪어 본 사람만이 아는 고통이죠. 하지만, 힘든 것에 시선이 매몰되지 않도록 하고 그 너머를 보려고 합니다. 내가 바꿀 수 있는 것만큼은 바꾸려고 해 봅니다. 그저 괴로운 순간에는 그것을 넘어설 무언가를 찾아봅니다.



이 모든 이야길 꽁꽁 숨기고 살았어요. ‘뭐 굳이’ 하며, 상처를 드러내고 싶지 않았나 봐요. 그런데 언젠가부터 제가 먼저 이야길 합니다. 이미 아문 상처라 그렇기도 하지만, 이야길 하며 또 한 번 아무는 것 같은 느낌.



그리고 이젠 너무 먼 미래까지 상상하며 살지 않습니다. 힘들 때의 상상은 대개 부정적인 것인 데다 별 쓸모도 없더라고요. 지나갈 것이고, 더 나아질 것이라 믿고, 더 내가 마음 쏟을 또 하나의 무엇이 있음 제일 좋은 것 같아요.



제가 작은 것에도 감사하고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준 시간이기도 해요. 그냥 그렇게 되어 버린 것 같아요. 남편이랑 막걸리 한 잔 했거든요(ㅎㅎ). 오늘은 그냥 덮어 뒀던 이야길 쏟아 놓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하루하루의 행복과 감사를 미뤄두지 않고 쓰면서 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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