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사는 게 다 그렇지 않냐'는 좀 깨니까

by PHILOPHYSIS

이 글을 남편이 싫어할 것 같지만,

언젠가 ‘그’에 대해 적어 보고 싶었다.






터키 배낭여행에서 만나 친구가 된 다이치는 현재 JAXA에서 일한다. 일본의 NASA 격이며, 그는 그곳에서 일본의 우주개발을 위해 일하는 공학 박사다. 딸 둘을 키우며, 영국에서 두어 해 연구하러 갔다 얼마 전에 도쿄로 돌아가 바쁜 삶을 살고 있다. 내가 보기에 무척 대단한 그지만, 그런 삶에 대해 젠체하거나 무언가 특별함이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걸 본 적이 없다. 벌써 12년을 꾸준히 이메일로 소식과 생각을 주고받았으니 세월이 참 빠르다. 지금은 그러지 못한 지 오래지만, 종종 일본에 가면 오랫동안 우리는 깊은 이야기를 주고받았고, 그때마다 나에게 뭔가 다른 방식으로 생의 욕구가 차올랐다.



그는 출근 전 버스 정류장 앞 카페에서 한 시간 이상 습작을 한다. 소설을 쓰며, 신인 작가 상에 도전하고 또 도전한다. 이미 완벽한 삶을 이뤘음에도, 그는 자기가 실현하고자 하는 것을 즐겁게 해 나간다. 터키에서도,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그는 만날 때마다 글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눈을 반짝였다. 어느 날은 고래의 수면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데, 어른의 눈도 그토록 반짝일 수가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보았다. 고래에 관한 소설을 쓸 거라며 큰 줄기를 이야기해 주는데 나는 그 눈을 신기하게 바라본 것만 떠오른다.



작년에는 하나의 소설을 완성해 제출했는데, 소식은 없다고 한다. 그때 내 이야기를 썼다고 하는데, 미안하다. 그러나 언젠가 자신이 등단하면 꼭 써보고 싶다고 한다. 뭔가 어떤 영감이 되어야 할 것 같은 행복한 압박감이 생긴다. 올해 역시 다른 이야기로 제출했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며, 잠시 쉬어야겠다며 장문의 이메일을 보내왔다. 이제는 한 두 해에 한번 꼴로 주고받는 그의 메일이 더욱더 반갑고 애틋해지기까지 한다.



그를 보면 '사는 게 다 그렇다'라는 건 없다는 걸 여실히 느낀다. 그렇게 생각하면 정말로 그렇게 되는 것 아닌가 싶다. 책임감이 막중할 본업, 가장의 무게, 반복되는 거절에도 자기 의심, 좌절을 끊임없이 이겨냈을 그를 상상해 본다. 상은 아직 받지 못했지만, 한해 한해 자신의 글이 나아지고 있음을 느낀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결국은 해낼 것임을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자기만의 이상에 가까워지기 위해 매일 실현해 나가는 사람은 참 아름답다는 것, 반복된 좌절을 실패라 해석하지 않고 결코 지지 않는 자기 믿음. 그 모든 합이 미디어나 책을 통해 얻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내 몸과 마음에 깊이 새겨져 내게 가짜가 아닌 진짜 용기를 주는 것이다.



형체가 불분명한 불안을, 그러나 그것을 달리 바라보는 시각을 공유하며, 자기 길을 찾아가는 과정을 서로 알려주며, 그와 오랫동안 주고받은 서신은 어느덧 내 청춘일기가 되었다. 그 당시 너덜너덜하고 날짜조차 제대로 정리 안된 일기장 외에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았기에 유일한 기록이나 다름없다. 조앤 K. 롤링에게 한 팬이 다가가 "You are my youth."라고 했다는 영상을 보고 울컥했는데, 나에겐 그와의 서신이 그렇다.



그가 알고 있는 나의 마지막 소식은 다시 시험을 쳐 집에서 두 시간 넘게 떨어진 중앙부처로 갔다는 것, 아들 남편과 떨어진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걱정, 그럼에도 일단 한번 해봐야겠다는 내 다짐이다. 업데이트를 해줘야겠는데, 왜 부끄러운 마음이 드는지 모르겠다. 그는 백 프로 내 결정과 행로를 응원해 줄 사람인데 말이다. 여느 때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언젠가 도쿄의 한 카페에 앉아, 삶에 대해, 꿈에 대해, 그 실현에 대해 다시 이야기하는 날을 그려본다. 생각만으로 벅차오른다. 20대 때의 그 촉촉한 피부는 어디 가고 조금 푸석하고 주름진 얼굴이겠지만, 눈은 더 반짝이고 미소는 더 당차게, 더 평온하고 여유로운 모습으로 말이다.



그때 그를 만나 '나 이렇게 살아왔어, 사는 게 다 그렇지 않냐'는 좀 깨니까.



그때 그에게 하고픈 말들을 떠올려 보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길 원하는지가 조금은 뚜렷해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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