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딜 가든 언니

혹은 나이 든 막내

by PHILOPHYSIS

직업을 몇 번 바꾸고 서른 중반이 되니 이제는 어딜 가든 내가 언니다. (서양이라면 그게 왜 할 포인트지만.) 새로 옮긴 조직, 부서에서도, 취미로 배우는 수업에서도, 다음 일을 위해 배우는 수업에서도 나는 언니가 되는 게 아직도 조금은 어색하다. 내가 항상 막내였던 때를 지나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그렇더라.



서른 중반이 그렇다고 나이가 많은 축인가 하면, 그건 상대적인 질문일 뿐이다. 누군가에겐 한물 간 나이이고 다른 누군가에겐 아직 가능성이 많은 젊음 그 자체일 것이다. 그러므로 내 입장도 중립적이다.



그럼에도 어딜 가도 내가 언니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건 내가 무언가를 배운다고 뽈뽈 거리지 않고, 더 나은 삶을 위해 떠나지 않았다면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문제다. 새로운 것을 접하고 배우려고 하면 나보다 뒷 세대를 마주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하거나 이제 막 인생의 첫 모퉁이를 돌고 있는 경우가 많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렇다고 내가 무작정 하던 일을 다시 생각해보고 더 나은 길을 찾아라, 그런 주의는 아니다. 나는 한 우물을 진득하니 파는 사람들을 정말이지 존경한다. 나의 남편도, 친구도, 그리고 특정 분야의 전문가들에게도 한 우물 판 이들만의 품격이 느껴진다.



하지만, 거기까지. 그들은 그들이고 나는 나의 세계를 살아간다. 다들 그럴 것이다. 그 세계에선 각자가 주인공이고 조금씩 더 나은 방향을 잡아간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있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것이고 다른 누군가는 거기서 빛을 보지 못해 다른 길을 찾아 나설 것이다. 다른 길을 찾아 나선다고, 또 나이 많은 막내가 되었다고 두려워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생각해본다. 아주 아주 만약에 내가 졸업하고 가진 첫 직장에 지금까지 몸 담았다면 나는 지금쯤 얼마의 연봉을 받으며 높은 직책을 꿰찼을 것이다. (정말이다, 그곳은 버티기만 하면 그런 자리가 거의 보장되는 곳이었다.) 그래 좋다. 두 번째 직장에서 지금까지 일했다면? 그곳은 자유롭고 재미있으나 안정이라곤 1도 없는 세계였다. 조금 더 업계에 내 이름을 알릴 수 있었을지는 모르겠다. 나는 그 일에 몰입하여 즐겼으니까. 세 번째 직장에선? 중략.



그렇다고 해도 두려움이 없을까. 머물러 있어도 되는 것인지 이 길이 맞는 것인지 끊임없이 성찰해 보며 때론 만족을 때론 아쉬움을 느끼는 것은 매한가지이지 않을까. 무엇보다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 한 때는 나도 ‘드디어 내 우물을 찾았다’며 만족했으니까.



수능을 보고 재수를 준비하는 이들은 그 시간이 무척 길게 느껴지고 또 한편 뒤처진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지금 나의 세대가 그렇듯 그 아득한 단어, 수능이란 관문을 한참 지나고 멀찍이서 바라보면? 학업에 대한 뜻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때 한번 더 해볼걸’ 하며 긴 인생 중 1~2년이 얼마나 짧은지 뒤늦게 후회할지도 모를 일이다.



학업이 아니라, 다른 곳에 뜻이 있어도 마찬가지. 그러므로 그 유예기간을, 그 공백을, 그로 인한 뒤처진다는 감각을 두려워하거나 아쉬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긴 시간 중 고작 한 두 해이며 그것이 장기적으로는 훨씬 멋진 여행이 될 테니까.



어딜 가든 언니가 된다는 것 혹은 나이 많은 막내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생물학적 나이를 너머 더 나아가기 위한 발걸음의 증명이며, 그만큼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뜻한다고 믿는다.



무엇보다 '아 그때 한번 해볼걸' 보다는 '어딜 가든 언니'가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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