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뷰티풀 썬데이

산티아고 순례길과 떼제 공동체(3)

by 메리힐데


햇살이 부드럽게 창문을 스치고, 손에 든 커피에서 올라오는 온기가 손끝까지 스며든다. 창밖을 바라보며 지난 한 주를 천천히 흘려보낸다.


오늘은 그저 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보는 날이라고, 마음속으로 살며시 다짐하면서.


그러다 문득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던 기억이 떠올랐다. 길 위에서는 모든 순간이 특별했고, 동시에 평범했다. 여느 길과 같이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었고, 나무와 바람이 있었으며, 웃다가 울기를 반복하며 끝을 향해 가는 여정이었다.


순례길 위에서는 초보자의 시행착오를 겪느라 첫 일주일은 꽤나 고생을 했다. 내 페이스를 찾지 못해 다른 이들을 따라가며, 내 강점과 약점을 하나씩 알아갔다.


사람들이 못 걸어서 천천히 걷는 것이 아니라는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되기도 했다. 욕심을 조금씩 내려 놓으며 길을 즐기는 법을 배우고, 속도보단 방향을 잡아보며, 돌아온 길을 한참 쳐다보기도 했다.

그렇게 아침 일찍 떠오르는 태양보다 지는 노을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었다. 태양이 하루를 마치고 밤으로 쉬러 들어갈 때, 오늘 하루가 참 아름다웠다며 붉음의 오묘함으로 열정 가득히 돌아가는 모습에 나도 한껏 물들곤 했다.


내 시행착오는 순례길의 가장 첫 날, 생장피에드포르에서 론세스바예스까지 가는 엄청난 오르막 구간에서 시작되었다. 초반부터 있는 힘껏 배낭을 동여매고 길을 성큼성큼 오른 탓에 얼마 못 가 헉헉대며 차오르는 숨과 함께 종종걸음이 되어갔다. 마치 있는 연료를 다 써버리고는 다음 주유소에 이르기도 전에 연료가 고갈된, 애처로운 차 같았다.


문제는 차가 아니라 운전사였다. 좋은 차를 다루지 못하는 초보 운전자처럼, 나는 내 몸과 마음을 다루는 법을 몰랐다. 숙련된 운전사였다면 부드러운 코너링, 완벽한 기어 변속을 통해 아주 부드럽고도 강한 드라이빙을 할 수 있었을 텐데... 애석하게도 나는 이제 갓 운전을 배우기 시작한 미숙한 꼬마 드라이버였고, 그렇게 처음으로 차와의 불안한 동행이 시작된 듯했다.


아주 먼 유럽, 외딴 산 위에서.

위태롭지만 설레는 모험이 시작되었다.


산티아고 순례길 첫날


순례길 초반, 이미 지칠대로 지쳐있던 나는 어느 순간부터 오르막을 보면 마음이 무겁게 내려앉곤했다. 언제 끝날까, 왜 이렇게 힘들까,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멈춰보기도 했지만, 오르막에서는 균형을 유지하면서 서있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럴 때 필요한 건 브레이크가 아니라 기어변속,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내딛는 걸음이었다.


그렇게 조금씩 몸과 길이 호흡을 맞추기 시작했다.

길 위의 느린 걸음이, 나를 조금씩 앞으로 이끌었다.



내리막은 또 달랐다. 브레이크에만 의존하면 속도를 잃거나 무릎에 무리가 갈 수 있었다. 잠시 앉아 햇살을 느끼며 숨을 고르기도 하고, 지그재그로 걸으며 무릎의 하중을 분산시키기도 했다.

아주 작은 움직임으로도 멈추지 않고 길을 이어가는 느낌.

그렇게 찬찬히, 길 위에서 나를 배려하며 걸었다.



기운이 넘치던 날도 있었다.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만 같던 날. 그럴 때는 출력의 80~90%만 쓰고 나머지는 남겨두었다. 그렇게 남겨둔 여유가 다음 길을 견디게 해주는 방법이자, 나 자신을 지켜주는 방법이었다.


길 위의 하루가, 삶의 하루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오르막도 내리막도, 그저 길일 뿐


길을 걷다 보면 오르막과 내리막은 단순한 경사의 차이 이상이 된다. 숨이 막히는 오르막처럼 느껴지는 날도, 편안한 내리막처럼 느껴지는 날도 있다. 그 모든 순간이 결국 하나의 길을 이룬다. 중요한 건, 그 길 위에서 보폭과 호흡을 천천히 맞추는 일이다.


길을 걸으며 나는 나 자신과 조금 더 가까워진다. 지친 날에는 발걸음을 느리게 하고, 기운이 넘치는 날에는 조금 더 활기차게 걷는다. 모든 걸음이 스스로를 돌보는 시간이고, 몸과 마음, 내 리듬에 귀 기울이는 시간이 된다.


누군가에게는 일요일이 숨 쉬기 편안한 내리막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월요일을 떠올리며 숨이 턱 막히는 오르막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오르막과 내리막은 그저 길의 일부일 뿐이다. 중요한 건 그 길 위에서 나 자신과 천천히 호흡하며 걸음을 맞추는 일이다.


길 위에서 나는 나 자신과 조용히 마주한다. 느리고 무거운 걸음도, 가벼운 걸음도 그대로 받아들이며 걷는다.

남몰래 흘린 한숨과 작은 발걸음들은 언젠가 추억이 되고, 그 속에서 나는 나 자신과 함께 걷는 법을 조금씩 알아간다.



그리고 문득, 뇌리를 스치는 한 문장.

'헉, 벌써 일요일이라니.'


그 말 속에는 한 주를 견뎌낸 나 자신을, 길 위에서 나를 지켜내는 중인 스스로를 만난 작은 놀람이 담겨 있다. 다가올 한 주가 조금은 두렵기도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느껴지는 햇살과 커피의 온기, 그리고 천천히 내딛는 걸음이 그 모든 마음을 감싸 안는다.


오늘은 일요일.

나는 길의 어디쯤 와 있을까?

오늘의 길 끝은 위를 향하고 있는가, 아니면 아래를 향하고 있는가?

가파른가, 완만한가?

그 위의 나는 어떠한가?


'오늘, 길 위에서 나를 만나야지. 그리고 천천히, 충분히 느끼며 걸어봐야지.' 다짐해본다.


햇살과 커피, 바삭하게 구워진 토스트를 모두 느끼며, 눈을 감고 늦가을의 바람을 깊이 들이쉬고 내쉰다.


오늘도 준비됐나?

가~보자고!



가~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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