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철없이 좋았던 그 시절

너와 함께여서 좋았어

by 메리힐데


장소와 음식이 추억이 될 때, 세월의 흐름을 느낀다는 말이 있다.


내가 학부시절 자주 가던 술집이 있다. 이름도 정겨운, '한 잔의 추억'. 졸업 후에도, 그때의 내가 그리워 이따금씩 찾아가는 집이다. 미닫이 문을 열고 들어서면, 바삭하게 튀기듯 구워져나온 전의 향기가 코끝을 스치고, 시원하고 칼칼한 콩나물국과 주먹밥이 서비스로 나온다. 벽과 천장에 걸린 소주병마개와 낙서들은, 마치 시간의 흔적처럼 나를 반긴다. 나는 그 속에 묻힌 내 흔적을 찾곤 한다. '저 중에 내 추억이 있을까...'


내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술 친구가 한 명 있다. 편의상 그녀를 '리버'라고 부르겠다. 술은 리버와 함께할 때 가장 재밌고, 진짜로 맛있다. 리버의 자취방에는 별의 별 술이 다 있었다. 리버와 나에게 술은 마법의 열쇠 같은 존재였다. 조금씩 절제된 잔잔한 분위기 속에 묻어나는 장녀 포스. 하지만 그 마법의 열쇠를 쓰면, 우리는 그 모든 타이틀을 내려놓고 온전히 자유로워 졌다.


그저 우리가 되는 순간.


그래서 우리가 만나서 술잔을 기울이면, 단순히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었다. 서로의 온전함을 곁에서 느끼고, 응원하는 시간이었다. 시간 안에서 쫓기지 않고 편안하게 유영하며, 겉을 감싸던 갑옷을 하나씩 벗고, 온전히 우리가 되었다.


갓 스무살이 된 우리는, 자유로워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마법의 열쇠 덕분에, 우리는 조금씩 서로의 곁에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다. 그래도 된다는 안전함을 학습하며, 우리는 조금씩 성장했다.


리버와 나는 어느덧 20년지기다. 8살, 초등학교 같은 반이 인연의 시작이었다. 그때는 서로 친하지 않았다. 그냥 같은 반 학우였을 뿐. 우연히 중학교 2학년 수학학원에서 다시 만났고, 고등학교 2학년에는 파란만장한 우정을 나누게 되었다. 많이 울고 많이 웃으며, 서먹했던 시절도 겪었다. 서로를 이해하고 싶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던 시기를 지나, 28살이 된 우리는 어느덧 서른 즈음에 이르렀다.


세월이 흐르면서 우정의 형태도 변했다. 예전에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서로를 붙잡았다면, 이제는 서로의 공간과 자유를 존중한다. 싸울 일은 줄었지만, 그만큼 사소한 말 한 마디, 혹은 작은 몸짓이 큰 울림이 된다.


특히 나는 가장 힘들었던 순간, 리버가 내 곁에 있어 준 기억을 잊을 수 없다. 말보다 더 큰 힘이 필요했던 순간. 그녀는 내 말을 들어주었고, 내 등을 조용히, '툭' 쳐주었다. 그 짧은 토닥임이, 그 간단한 몸짓이, 손끝에 묻어난 따뜻함이 내 숨통을 틔어주었다. 그 순간, 나는 온몸으로 깨달았다. 리버가 내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어느덧 그녀는 나의 진정한 친구가 되어있었다. 말로 위로하지 않아도, 존재만으로 마음을 지켜주는 벗. 그녀에게도 내가 그런 존재가 되었길 진심으로 바란다.


리버와 나는 서로의 거울이 되어 주었다. 그녀는 나의 약점, 고집, 두려움, 욕망을 조용히 비춰주고, 나 또한 그녀를 있는 그대로 비춰주는듯 했다. 그녀가 웃을 때 나는 미소짓고, 내가 흔들릴 때 그녀의 한숨이 내 마음에 닿는다. 친구와의 관계는 단순한 유대가 아니라, 서로의 내면을 비추며 함께 성장하는 시간이다. 관계 속에서 나를 발견하고, 내가 누구인지 조금씩 알아가는 시간이다.


우정이라는 관계 속에서 나는 한 가지 중요한 깨달음을 얻었다. 친구와 함께 있을 때, 내가 나여도 충분히 괜찮다는 안정감. 그 안정감이야말로 내가 조금씩 내 자신을 찾아가는 큰 힘이 되었다. 그리고 점점 깨달았다. 안정감은 외부에서만 얻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서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리버와의 경험은 내 안에 씨앗처럼 심어졌다.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다 이해할 수 없어도, 오해가 쌓이고 화가 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줄 수 있다는 경험. 이것은 나 자신에게도 같은 태도로 마주할 수 있게 해주었다.


사람에게 기대고, 위로받고, 토닥임을 받은 경험은 내 안에 꽁꽁 잠겨있던 문을 열게 했다. '나로 통하는 문', 스스로에게 다가서는 문, 진짜 나를 살펴보기로 한 문이었다. 세상 어디에서든, 혹은 누구와 함께하지 않더라도, 스스로가 가장 친한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술집의 소주잔이 빛을 반사하고, 콩나물국의 김이 따뜻하게 올라오는 순간, 리버와 함께했던 모든 시간들을 떠올린다. 처음엔 서먹하고 조심스러웠던 우리, 함께하기에는 텐션도 성향도 사고방식도 다른 것 투성이였던 우리. 서로의 가방에 몰래 진심을 담은 편지를 넣어 놓으며 마음 졸였던 우리, 많이 울고 웃으며 서로를 알아갔던 우리.

그렇게 어느덧, 말하지 않아도 마음을 전하고 등을 토닥이며 지켜줄 수 있게 된 우리.


서로의 연륜과 차이를 받아들이며, 각자의 시간을 살아가면서도 같은 순간을 공유한 우리. 그 친구라는 거울 속에서, 나는 조금씩 진짜 나를 마주했다.


가끔, 내 자신이 가장 이해되지 않고 미운 순간이 있다. 내 생각과 내 진짜 모습의 차이를 받아들이며, 그 삶 속에서 나를 위로해본다. 나에게 가장 친절해보고, 나를 위로하며, 내 부족한 부분을 품어본다. 리버와 함께했던 모든 순간은 결국 내 안으로 스며들어, 내가 스스로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는 과정을 시작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리고 오늘도 나는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리버와의 추억 속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웃고 울며 나눈 모든 순간 속에서, 나는 그 질문을 조금씩 살아본다. 관계 속에서 마주한 내 모습, 친구의 거울 속에 비친 내 마음. 그 속에서 나는 조금씩 나 자신을 찾아가고, 스스로에게 가장 친한 친구가 되어간다.


누군가의 토닥임이 필요할 때, 진짜 필요한 위로는 이미 내 안에 있을지도 모른다. 내 안에서 만난 가장 든든한 친구. 그와의 관계에서 마주한 크고 작은 오해들은, 실패가 아닌 '이해의 시도'로 남는다. 모든 오해와 분노는 내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과정이 되고, 훨씬 더 큰 사랑을 향해가는 여정이 된다.


언젠가 분명, 내 스스로의 힘든 시기에 '툭'하고 등을 토닥여주는 나를 마주할 순간이 있지 않을까?


남몰래 흘린 눈물과 쌓인 오해가 추억이 될 때, 나는 내 안에서 가장 친한 친구를 느낀다.


괜스레 힘든 날 턱없이 전화해 말없이 울어도 오래 들어주던 너
늘 곁에 있으니 모르고 지냈어 고맙고 미안한 마음들

사랑이 날 떠날땐 내 어깰 두드리며 보낼줄 알아야 시작도 안다고
얘기하지 않아도 가끔 서운케 해도 못 믿을 이세상, 너와 난 믿잖니

겁없이 달래도 철없이 좋았던 그 시절 그래도 함께여서 좋았어
시간은 흐르고 모든 게 변해도 그대로 있어준 친구여

세상에 꺽일때면 술 한잔 기울이며 이제 곧 우리의 날들이 온다고
너와 마주 앉아서 두 손을 맞잡으면, 두려운 세상도 내 발아래 있잖니

눈빛만 보아도 널 알아
어느 곳에 있어도 다른 삶을 살아도 언제나 나에게 위로가 되준 너

늘 푸른 나무처럼 항상 변하지 않을 널 얻은 이세상 그걸로 충분해

-안재욱,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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