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오늘을 살자
가끔은 사람에게 상처받는 일이 생각보다 오래 남는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리라 스스로를 타이르지만, 떠오르는 순간마다 다시 아프고, 잊었다 싶으면 어느 날 문득 마음을 찔러오는 기억들이 있다. '용서'라는 말은 그래서 어렵다.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건 때때로 너무 큰 요구처럼 느껴지고, 마치 스스로에게 "이젠 안 아파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 같기도 하다.
과연 용서는 타인에게 주는 선물일까?
과연 용서는 상대를 위한 거창한 호의일까?
어쩌면 용서는 상대를 위한 일이 아니라 나를 위한 일일지도 모른다.
나는 오랫동안 용서를 ‘누군가에게 건네는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상대가 미안해하면 내가 줄 수 있는 것, 마음이 어느 정도 가라앉아야 선택할 수 있는 것, 혹은 내가 좀 더 넓은 사람이 되기 위해 감당해야 하는 일쯤으로 여겼다. 그래서 용서를 하나의 '과정'이 아니라, 이미 완성된 '결과'로만 바라보곤 했다. 마치 '용서했다'라는 문장이 완성되기 전에는 어떤 불완전함도 허용할 수 없는 듯이.
하지만 용서는 언제나 생각보다 일상의 아주 작은 틈에서 시작되었다. 큰 상처가 아니라 사소한 오해 한 줄. 전하고 싶었던 말이 제때 닿지 못한 순간들,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이 불쑥 마음에 꽂힌 저녁.
그런 일들이 쌓여 마음의 기울기가 서서히 어긋났고, 나는 갈등을 빨리 정리해야 한다고 믿었다. 갈등이 너무 불편했기 때문이다.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면 불편함은 즉시 직면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몰아붙였다.
그 매듭을 천천히 살펴볼 여유도 없이, 마치 감정을 지울 수 있기라도 하다는 듯 '용서'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억지웃음을 떠밀었다.
우리 관계에서 미소가 사라지면 관계 자체가 깨질 것만 같았으니까.
하지만 그 불안이 오히려 관계를 흔들었고, 서로를 지치게 했다. 돌이켜보면 의도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그저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던 것이다.
진짜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나는 오랫동안 나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은 필요한 것을 주는 행위가 아니다. 내가 가진 것을 내어주는 것만도 아니다.
사랑은 상대를 있는 그대로 자유롭게 두는 일, 이미 온전한 그 사람의 곁에 내가 함께 있기로 선택하는 일에 가깝다.
그리고 이 진실은 나 자신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한다고 스스로를 몰아붙이지 않고, 마음이 바람결에 흔들리듯 자유롭게 흐르도록 두는 것. 그런 나와 함께 걸어주는 것. 그것이 내가 발견한 ‘나 자신에게의 사랑’이었다.
사랑을 알지 못했던 시절의 나에게 용서는 단지 감정을 지워내려는 시도로 남았다. 그러나 지우려 하면 할수록 매듭은 더 단단해져 갔다. 표면의 미소는 이면의 슬픔과 실망을 더 키웠고, 결국 분노가 되기까지 마음은 더 멀어져만 갔다.
그때 처음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용서는 아주 느린 회복의 방식이라는 것을.
회복은 행동보다 마음이 먼저일 때가 있다는 것을.
관계를 지키는 것보다, 때로는 마음의 평온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할 때가 있다는 것을.
‘너를 용서한다’보다, ‘나를 지키기 위해 감정을 내려놓는다’가 더 진짜 용서에 가까울 때가 있다는 것을.
용서는 누군가에게 베푸는 호의가 아니라 나를 살리기 위한 길이라는 것을.
상처의 매듭을 풀지 않으면 결국 그 감정의 그림자 속에서 웃는 척만 하는 나를 살게 된다는 것을.
그리고 무엇보다 이 길은 언제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불안함에서 오는 관계의 회복은 회복이 아니라 연극이 되어버린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용서는 내 마음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기 위한 아주 조용한 작업이었다. 빠를 필요도 없고, 멋질 필요도 없으며, 그저 나를 되찾는 과정이었다. 물론 지금도 쉽지 않다. 용서가 필요한지조차 모를 때가 많고, 어떤 방식으로 해야 하는지도 헷갈린다. 그럴 때 나는 결국 이 질문 하나로 돌아온다.
“시간이 필요한 건 아닐까?”
시간이 흐르고 마음의 파도가 조금 가라앉으면 그 질문 앞에서 아주 단순한 대답이 남는다. 모든 복잡한 감정들 뒤에 마지막으로 남는 한 문장.
“그래, 오늘을 살자.”
오늘의 내가 용서할 힘이 없다면 오늘은 용서하지 말자. 나는 오늘을 살 힘으로 오늘을 산다. 혹시 아는가, 내일의 나는 조금 다르게 느낄지?
용서는 타인에게 베푸는 호의도, 나에게 베푸는 호의도 아니다. 그저 매듭을 하나씩 바라보고, 매만지고, 조금씩 풀어내며, 내가 나에게 다시 돌아오는 길이다.
그래서 서두를 필요가 없다.
한동안은 그 매듭을 가만히 바라본다. 모양을 살펴보고, 손끝으로 단단함을 느끼고,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천천히 헤아린다. 그 모든 과정이 이미 용서다.
나는 지금 용서 중이다. 누군가를 향한 매듭도, 나 자신을 향한 매듭도.
어떤 매듭은 아직 바라보는 중이고, 어떤 매듭은 손끝에 걸려 있고, 어떤 매듭은 드디어 풀려났다.
중요한 건, “용서했는가?”가 아니라,
“나는 지금, 나에게로 돌아오는 중인가?”
그 질문일 것이다.
그래서 용서는 감정이 아니라 방향이다. 상대를 완전히 잊는 것도, 모든 감정을 깨끗하게 정리하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는 이렇게 말하는 일에 가깝다.
"이 상처가 있어도, 나는 오늘을 살아야지"
상대가 변하지 않아도, 사과가 없어도, 혹은 이미 연락 같은 건 애초에 불가능한 사이일지라도, 그 사실과 별개로 나는 나를 위해 다시 살아가는 방향을 선택할 수 있다.
완벽할 필요도, 한 번에 끝낼 필요도 없다. 어떤 용서는 평생의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괜찮다.
다시 나를 살아갈 수 있도록 마음을 조금씩 느슨하게 풀어주는 그 과정 자체가 이미 용서이니까.
그리고 문득, 이런 질문이 생긴다.
우리는 결국 누구를 용서하러 가는 길일까?
이 긴 여정의 시작에서, 가장 먼저 용서해야 했던 사람은 사실 '나 자신'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