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살아있는 존재입니다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희망을 열어두는 것, 그것이 정의입니다.

by 메리힐데

정의(正義).


‘바를 정(正)’에 ‘의로울 의(義)’.

글자 그대로 풀면, 정의란 ‘바른 것’이며 동시에 ‘마땅한 것’이다.


그러나 이 단순해 보이는 두 글자는 인류 사상사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치열하게 다투어져 온 개념이기도 하다. 우리는 마음속으로는 무엇이 정의로운지 비교적 또렷이 느끼지만, 그것을 말과 제도, 규칙의 언어로 옮기는 순간 정의는 곧바로 모호해진다. 정의는 직관에서는 명확하지만, 세상 속에서는 늘 불분명한 개념이다.


이 모호함은 정의에 대한 학자들의 서로 다른 이해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의란 ‘각자에게 그의 몫을 주는 것’이었고,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정의는 신적 질서에 부합하는 이성적 덕목이었다. 반면 근대에 이르러 롤즈는 정의를 ‘공정성’으로 재구성하며, 합의된 절차와 규칙 속에서 정의를 찾고자 했다.


이처럼 같은 ‘정의’라는 단어를 쓰고 있지만, 누군가는 분배의 문제로, 누군가는 도덕적 덕으로, 또 다른 이는 제도의 설계 원리로 이해한다. 정의는 시대와 학자, 맥락에 따라 서로 다른 얼굴을 드러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의가 완전히 상대적인 개념으로 해체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은 불의 앞에서 본능적으로 고통을 느끼고, 부당함 앞에서 설명 이전의 분노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의는 명확한 정의(definition)를 갖기 전에 이미 경험되는 감각이며, 논증되기 전에 먼저 요청되는 요구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정의는 개념이기 이전에 호소이며, 이론이기 이전에 책임의 문제로 떠오른다.


법의 언어는 이 모호한 정의를 붙잡아 제도화하려는 인간의 시도다. 그러나 법이 정의를 완전히 소유할 수는 없다. 법은 정의를 생산하기보다는, 정의를 향한 인간의 감각과 요구가 파괴되지 않도록 지켜야 할 경계선에 가깝다. 정의가 모호하다는 사실은 법의 한계를 드러내지만, 동시에 법이 왜 끊임없이 자기 성찰을 요구받아야 하는지를 설명해 준다. 정의는 완성된 답이 아니라, 법이 끊임없이 다시 물어야 할 질문이기 때문이다.





정의는 흔히 옳고 그름을 가르는 일로 이해된다. 사실을 확인하고, 규칙을 적용하고, 결론을 내리는 것. 누가 잘못했는지, 무엇이 위반되었는지를 판단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확정하는 일.


법을 배울수록 정의는 언제나 판단의 언어로 다가왔다. 판단은 분명하고, 결론은 안정적이며, 사건은 닫힌다. 그 안에는 논리적 완결성이 있고,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정의롭다’고 부른다.


그러나 내가 체감한 정의는 그보다 훨씬 느렸고, 훨씬 덜 단정적이었다. 현장에서 마주한 정의는 한 번의 판단으로 끝나지 않았다. 결론이 내려진 뒤에도 사람의 삶은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판결 이후의 시간,

결정 이후의 하루,

그리고 그다음 날들까지.

정의는 언제나 그 이후의 삶과 함께 있었다.


그래서 내 질문은 자연스럽게 바뀌었다. 이 판단이 옳은가가 아니라, 이 판단 이후에도 이 사람의 삶이 계속 흘러갈 수 있는가. 아니면 바로 그 지점에서 멈추어 버리는가. 이 규칙은 지금 이 삶을 계속 살아가게 하는가.




법은 종종 정합적으로 작동한다. 논리는 맞고, 절차는 흠이 없으며, 체계 안에서 완결된다. 그것은 법의 강점이자 우리가 법을 신뢰하는 이유다. 그러나 그 완결성이 언제나 삶을 살리는 것은 아니다. 모든 요건을 충족했음에도 삶이 무너지는 순간들이 있다. 법은 제대로 작동했지만, 그 작동을 삶이 견디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다지 멀지 않은 거리에서,

어쩌면 오늘도 스쳐 지나간 군중들 속에,

'법대로'의 작동을 견디지 못하는 삶이 존재한다.




내게 정의는 작동의 성공이 아니라, 삶의 지속 가능성에 더 가깝다.

재판부의 결정 이후에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지, 존엄이 완전히 소진되지는 않는지, 삶이 계속될 수 있는 바닥이 남아 있는지.

정의는 바로 그 여지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흔히 정의로운 결론을 말한다. 그러나 결론은 하나의 순간일 뿐, 삶은 흐름이고, 정의는 그 흐름을 완전히 끊어버리지 않는 상태에 가깝다.


아무리 정합적인 판단이라도 삶의 시간을 전부 차단해 버린다면,

그 정의는 어딘가에서 실패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사실을 잊는 순간,

법은 정확해질 수는 있어도 따뜻해질 수는 없다.


이 장에서 말하는 정의는 감정적인 연민이나 막연한 선의가 아니다. 그것은 법이 인간의 시간과 속도를 얼마나 존중하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판단을 멈추자는 것이 아니라, 판단이 삶의 흐름을 완전히 대체해서는 안 된다는 경계다.



정의는 결론이 아니라, 삶이 계속될 수 있는 상태다.

법이 그 감각을 잃지 않을 때, 정의는 비로소 사람의 언어로 남는다.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희망을 열어두는 선택,

그것이 내가 믿는 정의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믿는 '바른 것'이며,

동시에 '마땅한 것'이다.


정의는 판단이 아니라, 삶이 끊어지지 않도록 남겨진 흐름이다.
정의는 정의될 수 없기에, 더욱 책임 있게 다루어져야 한다.


화, 목, 토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