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의 힘, 시민의 의무

체계 이전의 자리에서

by 메리힐데

법과 제도는 언제 움직이는가.


사회가 먼저 움직일 때인가,

아니면 국가가 방향을 제시할 때인가.


나는 오랫동안 법이 사회를 이끈다고 배워왔다. 조문이 생기고, 제도가 마련되면 사회는 그 질서 안으로 들어온다고. 그러나 현장과 현실을 통과하며, 나는 점점 반대로 묻게 되었다. 사회가 먼저 움직이고, 법은 그 뒤를 따라오는 것은 아닐까.


법의 도착은 언제나 시간과 인내를 요구한다.

지난한 협의와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과정, 합의를 만들어 그것을 제도로 옮기기까지는 필연적으로 절차와 시간이 필요하다. 그 사이에는 언제나 공백이 생긴다. 그리고 그 공백의 시간 동안에도 삶은 멈추지 않는다.

문제는 결국 이것이다. 그 시간을, 누가 견디는가.


법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자리에서,

사람들은 법 없이 버티고 제도 없이 견디며 살아간다.

멈추지 않는 공백의 시간 속에서,

사람은 오히려 가장 취약한 상태로 그대로 노출된다.

그래서 나는 다시 묻게 된다.

법이 움직이기까지의 이 공백을,

우리는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채로 견뎌야만 하는가.





현장에는, 법보다 먼저 무너지는 사람들이 있다. 법은 아직 준비 중이고, 제도는 검토 단계에 머물고, 국회는 논의를 거듭한다. 그러나 사고는 이미 일어났고, 삶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법이 사람을 살리기 위해 존재한다면,

법은 그 사람을 ‘혼자‘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된다.

최소한, 그 기다림의 시간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법은 사람을 버려두지 않아야 한다.
법은 개인의 외로운 기다림을 함께하는,
그늘이자 언덕이며,
사람과 사람을 잇는 다리여야 한다.”


이 믿음을 내게 가장 선명하게 각인시킨 것은, 한 친구의 죽음이었다. 그날은 평범한 하루였고, 누군가가 특별한 위험을 선택한 순간도 아니었다. 그러나 한 번의 사고는 되돌릴 수 없는 결과를 남겼고, 그 이후에야 사회는 비로소 그 사고가 ‘개인의 불운’이 아니라 구조의 문제였음을 말하기 시작했다.




이웃이 다치고, 죽는다.

당연하다고 믿었던 일상이 한순간에 무너진다.

서로 다른 아픔들이 소리 없이 엉켜 흐느끼고,

의미 없는 걸음들을 하나둘 내딛는 동안,

우리는 너무 많은 시간을 잃는다.

그리고 그제서야 겨우,

법은 태어난다.


내가 마주한 현실은 분명했다.

국가의 필요라는 이름 앞에서 쉽게 동원되는 사람들,

그러나 사람들의 필요 앞에서는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국가.


그리고 그 사이의 시간은 언제나

구체적인 얼굴과 이름을 가진 개인,

아무개의 몫으로 남았다.


국가는 스스로 움직이지 않았다. 법을 바꾼 것은 제도의 선의가 아니라, 끝내 침묵하지 않았던 시민들이었다. 개인의 상실이 사회의 질문이 되고, 질문이 요구가 되고, 요구가 제도의 언어로 번역되기까지. 그 모든 과정의 출발점에는 늘 먼저, 사람이 있었다.


우연한 사고로 설명되었던 죽음은, 사실 오래 방치된 구조의 결과였다. 분노는 거리로 나왔고, 질문은 기사로 쓰였으며, 이름 없는 시민들의 요구는 마침내 하나의 법으로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나는 분명히 보았다. 국가를 움직인 것도, 제도를 설계한 것도, 법을 바꾸게 만든 것도 결국 시민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흔히 묻는다. 법이 사회를 바꾸는가, 사회가 움직인 뒤에야 법이 따라오는가. 나의 경험은 후자에 가까웠다. 시민이 먼저 문제를 감각하고, 고통을 언어로 만들고, 질문을 던질 때 비로소 법은 움직였다.


국회의원도, 관료도, 판사도 결국은 우리의 대표자일 뿐이다. 그들에게 동력을 주는 것은 시민의 목소리이고, 그 목소리가 모일 때 국가라는 기계는 방향을 바꾼다. 우리가 먼저 움직이고, 먼저 말하고, 먼저 문제를 드러낼 때 비로소 국가는 응답할 이유를 갖는다.




시민은 단순한 보호의 대상이 아니다.


시민은 질문하는 존재이고,

움직이는 존재이며,

국가를 다시 설계하게 만드는 출발점이다.


법은 그 뒤를 따른다.

언제나 조금 늦게, 그러나 반드시.


그래서 나는 시민의 힘을 믿는다. 시민의 힘은 제도가 오기 전까지의 시간을 서로의 삶으로 메우려는 선택에서 시작된다.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고통을 말로 꺼내고, 법의 언어가 되기 전의 이야기를 포기하지 않는 일. 그 반복 속에서 사회는 이미 한 발 앞서 움직이고, 법은 결국 그 뒤를 따라올 수밖에 없게 된다.


그래서 시민의 힘은 동시에 시민의 의무이기도 하다.

국가가 모든 것을 대신해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에게, 침묵은 중립이 되지 않는다. 법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자리를 방치하지 않겠다는 태도, 그 자리를 임시로나마 지탱하겠다는 책임감. 그것이 시민이라는 이름에 포함된 무게다.




체계 이전의 자리에서 시작된 움직임이 모일 때,

국가는 비로소 방향을 얻는다.

그리고 그때에야 법은 단순한 규칙을 넘어,

사람의 삶을 향한 응답으로 남을 수 있다.


법이 사람을 살리기까지의 시간, 그 공백을 메우는 일.

그 자리에 서는 것이 시민이라면,

법은 언젠가 그 뒤를 따라와

사람 곁에 남게 될 것이라고,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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