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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리힐데 Dec 04. 2022

너무 빨리 용서하지 마라

용서하고 싶지만 그러기엔 너무 화가날 때

용서는 우리에게 상처를 입히는 사람의 학대 행위를 참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뿐 아니라 그 사람도 사랑할 수 있는 건강한 방법을 찾아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데니스 린, ‘너무 빨리 용서하지 마라’ 중-


나는 용서를 글로 배운 사람이다.

용서해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 비로소 행복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배웠다. 용서해야 미움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까. 심지어는 성경에 나오는 용서에 대한 구절,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를 되뇌이며, 스스로 용서받기 위해 타인을 용서하려 노력했다. 용서가 무엇인지 모르는 채로. 아, 더 정확히 말하면 용서의 의미를 오해한 채로.


용서란 무엇인가

나에게 용서란 더 이상 미워하지 않는 것, 인내하는 것, 참는 것, 기억에서 지우는 것. 즉, ‘없던 일로 하는 것’이었다.

어릴 때부터 나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하던 사람들은 어딜가나 있었다. 항상 상처만 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이 힘들 때나 술을 마셨을 때, 혹은 기분이 안좋을 때면 너무나도 쉽게 나에게 막말을 하곤 했다. 나의 가치를 무너뜨리는 말들. 나의 존재가치를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리는 말들. 내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던 말들. 나만 없으면 될 것 같다는 말들. 이 세상에서 나랑 사는게 제일 힘들다는 말들. 그리고 이런 말을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내가 정말 혼자되었다고 느낄 때 유일하게 기대고 싶은 존재에게 들을 때면, 밀려오는 분노와 절망감은 생각보다 크게 나를 에워싸곤 했었다.

그때마다 나는 그들에게 ‘살아있는 생명’으로서의 존중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들과 있으면 나의 가치가 곤두박질쳐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제일 화가 났던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생토록 그들에게만큼은 조건 없는 사랑을 바라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수치감을 느껴왔다. 나에게 막말을 하는 사람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분노가 차올랐다.


분노의 화살은 마침내 나를 향했다.
“나는 왜 그들에게 가치를 인정받고자 하는가?”라는 보다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 순간,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부터 나는 ‘나’를 용서하는 여정에 올랐다.





용서의 참된 의미

보통 우리는 나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들을 용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기도를 포함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는데도
여전히 상처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면 어떻게 용서를 할 수 있겠는가.
상처를 입을 때 대다수의 사람들은 상대가 자신을 짓밟도록 내여버두는 수동적인 피해자가 되거나
복수를 함으로써 폭력의 악순환에 참여하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그러나 우리는 용서의 다섯 단계의 과정을 통하여
상처에 대하여 좀 더 창의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


책 [너무 빨리 용서하지 마라]에서 소개하는 용서의 참된 의미는 이렇다.

‘능동적으로 악에 저항하고, 자신의 존엄성을 유지할 뿐 아니라, 우리에게 상처를 준 사람도 자신의 존엄성을 되찾도록 도와주는 것’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마태오복음서 5,38-42-

글자 그대로 해석해보면 오른 뺨을 맞았을 때 왼뺨도 내어주고,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 ‘여기 외투도 가져가십시오’라고 말하며 사는 것을 지향해야 한다.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하겠구나’ 싶었다. 부처가 되거나 성인군자가 되라는 말을 넘어 심지어는 ‘인간’이 되지 말라는 말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서 [너무 빨리 용서하지 마라]는 시대적 배경을 고려한 색다른 해석을 소개한다.


(1) 오른 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성소학자 월터 윙크 박사는 자신의 수상 저서인 [engaging the powers]에서 어쩌면 성경 말씀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해왔던 것과는 반대되는 것을 의미할지도 모른다고 언급했다. 성경에서 말씀이 시작된 시대와 지리적 배경에 따라 고대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 이 말씀을 살펴보면, 그 당시 왼손은 더러운 일을 처리할 때만 사용하기 때문에 누군가를 때리려면 오른손을 사용해야만 했다.

오른손으로 상대의 ‘오른 뺨’을 때리기 위해서는 손등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예수님이 살던 문화권에서 누군가를 손등으로 때린다는 것은 매우 특별한 뜻이었다고 한다. 이것은 권위를 내세우는 행동이었는데, 상대적으로 더 큰 권위를 가진 사람이 권위가 낮은 이에게 ‘모멸감’을 주는 의미가 담겨있던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여기에서 말하는 ‘다른 뺨’은 ‘왼뺨’을 뜻한다. 오른손으로 왼뺨을 때리기 위해서는 손바닥이나 주먹을 사용해야 한다. 이는 동등한 사람들 사이에서만 허용되는 행위였다. 그러므로 다른 뺨마저 돌려 대라는 말은 그와 같은 존재 가치를 지닌 것을 드러내어 수동적 피해자로 남지 말라는 지침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스스로의 존엄성을 회복하고 굴욕을 거부하라는 것, 스스로의 존엄을 회복함과 동시에 상대에게 ‘한 인간이 다른 인간보다 낫다’는 오류를 성찰함으로써 그 자신의 존엄성 또한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태도를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2)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 겉옷까지 내어주는 것은 곧 ‘벌거벗음’을 의미한다. 문화적으로 예수님 시대에는 ‘벌거벗는 것’보다 ‘벌거벗은 이를 쳐다보는 것’이 더 명예롭지 못하고 수치스러운 행동이었다고 한다.

월터 윙크 박사의 해석을 종합해보면 이 구절이 갖는 의미는 다음과 같다. 타인에게 굴욕을 주려했던 마음으로 인해 스스로 굴욕을 느끼게 됨으로써 오히려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보고 회개할 기회를 갖게 되는 것.

이 또한 (1)에서와 같은 맥락의 깨달음을 준다.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우리는 자신의 존엄성을 회복할 수 있는 힘을 되찾고 나를 억압한 이에게 회개의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 말이다.


(3)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예수님 시대에 팔레스티나에서는 로마군이 그들의 지배에 있는 지역민에게 짐을 운반시킬 수 있었다. 지역민들은 이를 매우 싫어했다. 따라서 폭동이 일어날 것을 우려한 영리한 로마인은 강제노역에 동원하는 양을 제한하도록 만들었다. 한 명의 병사는 지역민에게 그의 짐을 단 1마일만 지고 가도록 요구할 수 있었고, 더 가자고 요구하면 처벌을 받았다.

다시 성경 말씀으로 돌아와, 로마 병사가 지역민에게 강제노역을 시킨다면, 1마일이 되는 지점에 도착한 지역민은 짐을 돌려주지 않고 계속 걸어갈 수도 있다. 그렇다면 로마 병사는 처벌을 받을까 두려워할 것이고, 짐을 돌려 달라고 사정하게 될 것이다. 이 책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적 힘, ‘지혜’를 이용하여
상대방의 지나친 행위에 응답할 바를 스스로 결정하고,
피해자가 되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상대방을 공격하는 ‘폭력’의 악순환에 갇히는 일 없이
자기 자신의 존엄성을 극복하게 된다.”


(4)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마태오복음서 5장 38~42절의 말씀의 소제목은 [폭력을 포기하여라] 이다. 그렇기에 악인에게 맞서지 말라는 예수님의 참 뜻은 ‘눈에는 눈으로 되갚지 말고, 받은 것과 똑같은 폭력으로 갚아주지 말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것이 스스로 받은 모멸감과 굴욕을 외면하라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대신 우리에게 폭력적으로 굴욕을 주는 이가 있다면, 비폭력적이고 창의적인 새로운 방식으로 저항함으로써 스스로의 존엄성을 되찾고 상대방의 존엄 또한 회복할 기회를 주는 태도를 가질 수 있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결국 오른뺨을 맞은 ‘수동적 피해자’로 남지 않는 것, 강제노역에 동원된 불쌍하고 힘없는 피해자로 남지 않으며 상대 또한 존엄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는, 지혜로운 사랑의 방법을 일러주신 것이다. 용서의 참된 의미를 알려주신 것이다.



용서는 어렵다

이 책은 말미에 ‘용서’의 예화들을 소개한다. 그 중 하나는 아래와 같다.

6살 된 카일은 집안일을 돕기 위해 매일 저녁 6시 식사시간에 맞추어 식탁을 차리기로 엄마와 약속했다. 하지만 이틀 연이어 제시간에 식탁을 차리지 않았고 그때마다 엄마 다이엔은 카일과 그 상황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나 세번째 날 저녁에도 6:15가 되도록 여전히 식탁에는 아무 것도 없었고, 배가 고팠던 카일의 누나와 아버지는 빨리 저녁을 먹으려고 대신 식탁을 차리겠다고 했다. 다이엔은 지금 카일이 자기가 안하면 우리가 대신 한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것은 정말로 그를 돕는 것이 아니고 우리 가족을 돕는 것도 아니라고 그들을 저지하며 모두 식탁에 앉으라고 기분 좋게 말했다. 그리고 부엌에서 스파게티 냄비를 가지고 와서 아무 것도 차려지지 않은 나무 식탁 위 각 사람 앞에 스파게티를 덜어주고, 그 위에 소스를 붓고, 그 위에 샐러드 드레싱을 부어 주었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여전히 평온하고 다정하고 존중하는 태도로 그날의 디저트인 얼린 요구르트를 가지고 와서 스파게티 위에다 얹어 주었다. 깜짝 놀란 카일은 접시, 나이프, 포크 없이 저녁을 먹어야만 했고, 식탁을 차리지 않은 것에 대한 논리적인 결과가 무엇인지를 경험했다. 그날 이후 카일은 항상 제시간에 식탁을 차렸다.

용서란 그저 인내하고 참고, 없던 일로 해주는 것이 아니다. 용서는 ‘사랑’을 필요로 한다. 용서는 나의 존엄성을 회복함과 동시에 나를 짓밟은 상대에게도 그의 존엄성을 회복할 기회를 줄 수 있는 것까지 포함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만약 다이엔이 그저 참고 인내하는 것을 용서라고 생각했다면, 그녀는 대신 식탁을 차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행동은 카일에게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결과를 낳았다.


이 책에서는 자녀에게 ‘용서’를 베풀 때, 중요한 마음가짐이 한가지 더 소개되어 있다. 이는 부모 자식간의 관계가 아니더라도, 용서하는 이와 용서받는 모든 사람들에게 통용되는 이야기인데,

자신의 감정을 모니터링하여 ‘처벌적’, ‘보복적’ 태도를 갖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


위 예화에서 다이엔은 ‘기분 좋게’  카일에게 와서 밥을 먹으라고 말한다. 왜 식탁을 차리지 않냐고, 너가 약속한 것이 아니냐며 화내고 짜증내지 않는다.

얼굴을 붉히지 않고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그녀는 그녀를 존중하지 않은 카일과 동일한 잘못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수동적 피해자’로 남지 않을 수 있었고, 카일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기회까지 마련해줄 수 있었다. 이런 다이엔을 보며 필자는 참된 용서를 위한 두 가지 단계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


첫 번째는 ‘나의 일’과 ‘상대의 일’을 구분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나의 일’에 집중하는 것이다.(‘상대의 일’에 간섭하지 않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내가 해야하는 일은 ‘나의 존엄을 회복하는 일’이다. 당신은 더이상 나를 모욕해서는 안되며, 어떤 방식으로든 나에게서 당신에게 대항하는 힘을 빼앗아 갈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어야 한다.

하지만 상대의 행동을 어찌할 수는 없다. 나를 모욕하는 상대의 행동이 오히려 상대방 스스로를 더럽히고 있는 ‘그의 일’임을 알고 있다면, 우리는 그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며 진을 빼고 있지 않을 수 있다. 그 시간에 ‘나의 일’에 집중함으로써 수동적 피해자로 남지 않을 수 있고, 창의적인 용서의 주체가 되어줄 수도 있다. 즉,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게 된다.


참된 용서의 개념 중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에 대해 처음에는 오해를 할 수도 있다. 마치 내가 그를 ‘깨닫게 해줄 수 있는 존재’가 되는 양, 그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한 지위에 있는 양, 우월주의적 태도를 취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내가 이해한 바는 다음과 같다.


내가 상대에게 깨닫는 기회를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온전히 ‘나의 일’에 집중할 때, 상대에게도 깨달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
즉 내가 나의 존엄을 다시 세우는 것에 집중할 때,
상대도 그의 존엄을 다시금 세울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나’를 용서한다는 것

나에 대한 분노는 ‘수동적 피해자’가 되기를 반복했던 행동에서 비롯되었다. 나의 일, 내가 할 수 있는 일, 내가 해야하는 일은 스스로를 존중하고 나의 권리를 찾기에 집중하는 것이다. 내가 나의 존엄을 다시 세우는 것에 집중할 때, 그것을 보는 내가 스스로를 모욕하고 있었음을 깨닫고 스스로를 다시금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용서’란 ‘나의 일’에 집중하는 것이다. 타인과 나를 구분하고, 나의 일에 집중할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용서, ‘사랑’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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