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죽음의 땅에서 씨앗이 생명을 싹 틔울 것이다.

by 메리힐데

하느님을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매일 미사를 가고 기도를 하고 피정을 다녀오고 신부님과 면담을 해보기도 한다. 영적 독서를 하기도 하고 성경을 무작정 읽어보기도 한다. 성체조배를 하며 예수님께 말을 걸어보기도 한다. 어떻게 하면 나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을까?


사제의 길이나 수도자의 길을 걷기 위해서는 '하느님과의 인격적 만남'이 필요하다. 그래야 종신서원까지 장장 10여 년에 걸친 대장정을 무사히 마칠 수 있기 때문이다. 10년의 시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10년의 시간 동안 변하지 않는 마음이 있을까.


마음은 초단위, 분단위로도 변한다.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른 것이 사람이라는데, 강도 산도 변하는 기나긴 시간 동안 마음이 변하지 않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나는 '변하지 않음'은 불가능의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 곳에 깊이 뿌리내린 나무가 사계절을 버티며 1000년의 세월을 사는 것처럼, 종잡을 수 없는 변덕 속에서 영원히 신앙을 갖는 것도 가능하다. 깊이 내린 뿌리가 필요할 뿐. 그 뿌리가 바로 '하느님과의 인격적 만남'이 아닐까.


성경을 라틴어로 처음 번역한 교부 성 예로니모가 죽음에 앞서 기도한 내용은 이렇다.

"오 하느님, 저는 당신께 성경을 번역해 바쳤지만 당신께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저는 당신께 사제의 삶을 봉헌했지만 당신께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저는 당신께 기도를 드렸지만 당신께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제게 다른 무엇을 원하십니까?"

그러자 하느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를 용서할 수 있도록 너의 죄를 다오."


성경은 이른바 거룩한 역사를 우리에게 들려주면서 거룩한 역사에 대해 부정적 태도를 취하라고 가르친다. 또한 길이 끊어진 것처럼 보일 때조차 인내하라고 가르친다. 바로 거기서 불가능이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불가능을 드러내는 것,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신앙이다.


애석하게도 하느님의 말씀, 곧 성경이 인생을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살아내기 위해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다. 한 동안 나는 마술사에게 마술을 부려보라고 하듯 하느님을 대했다. 꼭 겟세마니 동산에서 악마가 예수님을 유혹하듯. 악마는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라고 유혹했고, 나는 '하느님, 제가 너무 힘든 이 상황을 해결해 주세요. 내일 아침 눈을 뜨면 이 모든 고통을 없애주세요.'라고 기도했다.


하느님의 대답은 이러했다.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2코린 12,9)


하느님은 문제를 없애주기 위해 오시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한계를 없애주기 위해 오신 것도 아니다. 그저 우리가 나약함, 한계의 거대한 무게에 짓눌려 부서져버리지 않도록, 이것들이 우리의 삶에 행사하는 두려움으로부터 해방하기 위해 오신 것이다.


내가 믿는 하느님은 마술사가 아니라, 자녀를 너무나도 사랑하는, 사랑 그 자체인 아버지다. 있는 그대로 내 모습에 대한 비난 또는 죄책감을 느끼는 내적 불안과 공포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사랑 안에 뛰어들 때 비로소 삶의 의미가 분명해진다.


내게 상처와 실패, 불안과 조급함, 불완전함이 많은 만큼, 하느님께서 내 안에서 일하실 기회가 많아진다. 내가 나의 모든 결함을 하느님께 드릴 때, 하느님은 기적을 일으키신다. 상황이 이보다 좋지 않을 수 없어 내게 남은 선택지는 절망뿐이라고 느껴지더라도, 하느님을 믿고 비참한 나 그 자체로 약속의 땅으로 뛰어들자. 거기, 무덤 속에서 기다려보자.


에제키엘 예언서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온다.

내 백성아, 내가 이렇게 너희 무덤을 열고, 그 무덤에서 너희를 끌어올리면, 그제야 너희는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에제 37, 13)


주님을 만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내가 무덤 속에 있는 것이다. 지옥에서조차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죽음의 땅에서 씨앗이 생명을 싹 틔울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무덤 속에는 그리스도가 계시기에, 씨앗이 심겼고 분명 열매를 맺을 것임을 나는 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나서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있었던 것처럼. 모든 것을 잃었을 때, 세상이 무너져버렸으면 하고 바라게 될 때, 스스로를 사랑할 힘조차 잃어버린 순간일지라도 내 두 다리로 서있어 보자. 더 이상 희망이 남지 않은 이곳으로 보이더라도, 그 비극의 무대에서 서있기를 고집해 보자. 그래야 부활의 소식을 들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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