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간 세계를 떠도는 장기 여행을 하면서 남편은 단 한 번도 머리를 자르지 않았다. 여행을 떠날 때만 하더라도 런던의 유명한 바버숍에도 가보고, 어느 외딴 나라의 작은 이발소에서도 머리를 잘라보고 싶다고 했는데, 막상 이발소 앞을 지날 때마다 시큰둥했다.
장발이 되어가는 남편의 머리를 보면서, 나는 그의 머리카락을 바리깡으로 미는 것이 소원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내게 절대 자신의 머리칼을 맡기지 않던 남편은, 여행의 막바지에 우리와 함께 여행하기 위해 미국으로 날아온 처제에게 머리를 내어주었다. 손재주 없는 게 분명한 아내보다는, 미대 나와서 강아지 미용을 업으로 하고 있는 처제가 더 믿음직스러웠던 것이다.
중구난방으로 삐죽삐죽 자라던 남편의 머리칼이 동생의 단순한 손놀림 몇 번만에 차분해졌다. 사람 머리 손질하는 걸 배워본 적 없는 동생의 손길로도 꽤 그럴싸한 헤어 커트가 완성되었다. 갑자기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샘솟았다.
생각해보니 내가 어릴 적에 미용을 배웠던 엄마는 늘 집에서 내 머리를 자르고 파마를 해주셨다. 당신의 머리도 늘 직접 자르고, 염색은 물론 셀프 펌까지 했다. 엄마도 하고, 동생도 하는데, 나라고 못 할 게 뭐야?
머리가 너무 길어서 감고 말리는 시간도 오래 걸리고 거추장스럽게 느껴지던 어느 날, 보자기를 내 목에 휘리릭 두르고 문구용 가위를 손에 들고 세면대 앞에 섰다. 양갈래로 질끈 묶은 머리카락 한쪽을 손으로 부드럽게 쥐고 원하는 길이를 가늠하여 가위로 싹둑 잘랐다. 꽤 괜찮은 듯싶어 반대쪽 머리도 잘라내었다. '어라? 조금 길이가 다른 것 같은데?' 갸우뚱거리며 왼쪽 머리를 조금 더 자르고, 그다음엔 오른쪽 머리도 조금 더 자르고... 의도치 않게 내가 원했던 길이보다는 더 많은 머리를 잘라냈지만 완성된 머리 스타일은 나쁘지 않았다. 아주 간단하게 몇 번의 가위질을 통해 미용실에서 머리 자를 2만 원 아꼈다.
머리카락을 직접 자르는 것은 생각보다 쉬웠다. 너무 간단하고 순조로워서 놀랐다. 미국 등 해외에서는 미용실 가는 비용이 너무 비싸고 부담스러워서 집에서 직접 커트하거나 펌과 염색을 하는 게 굉장히 자연스러운 문화라고 한다. 그렇지만 나는 한국 사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직접 내 머리를 자르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머리는 언제나 미용실에 가서 서비스를 받는 게 너무도 당연하다고 느꼈으니까. 그런데 나 혼자서도 충분히 머리카락을 다듬을 수 있었다.
어떠한 의문도 품지 못한 채 줄곧 당연하다고 느끼는 것들에 대해 그것이 정말 당연한 것일까 한 번쯤 고민해봄직하다. 의외로 외부의 힘과 기계의 힘, 자본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애쓰지 않고 해낼 만한 일이 많다.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 리스트가 한 가지 더 늘었다는 사실은 꽤나 기쁘다. 그리고 내 용돈을 2만 원이나 아꼈다는 것도 매우 기쁘고, 앞으로 원한다면 미용실에 영영 발걸음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홀가분했다.
셀프 커트에 자신감이 붙은 나는 한밤중에 충동적으로 앞머리를 잘랐다. 인터넷이나 유튜브를 찾아보지도 않은 채 그냥 빗으로 자르고 싶은 만큼의 머리를 앞으로 내어 싹둑 잘라버렸다. 길이가 맞지 않는 것 같아 양쪽으로 조금씩 더 자르다보니 어느새 앞머리는 눈썹 위로 깡총하게 올라왔다.
아뿔싸, 그쯤 되니 망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감이 넘쳐도 너무 넘쳤다. 너무 짧아서 넘겨지지도 않고 핀으로 고정되지도 않는 촌스러운 앞머리를 한 달쯤 달고 지내다가 결국 미용실에 갔다. 전문 디자이너 선생님이 정돈해주고 나서야 내 머리는 조금 봐줄 만해졌다. 앞머리와 뒷머리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옆머리를 사선으로 잘라 흘러내리는 모습을 봐가면서 아주 조금씩 기장을 잘라내는 디자이너 선생님의 숙련된 손길을 지켜봤다. 확실히 전문가는 달랐다.
앞머리를 자르는 김에 뒷머리 숱도 쳤는데 늘 자라 머리처럼 부하게 부풀던 머리가 차분해졌고 한결 단정해졌다. 어깨 아래로 내려오는 머리카락에는 에센스보다 조금 더 무서운 질감의 오일을 발라주면 더 정리하기 쉬울 거라는 꿀팁도 얻었다.
미용실을 나오면서 단정해진 머리칼을 보니 2만 원이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앞으로 머리 기장은 집에서 내가 자르되, 1년에 한 번쯤 더운 여름에는 머리숱을 치러 미용실에 와도 괜찮을 것 같았다. 적절하게 소비하며 나만의 규칙을 찾아가기.
숙련도가 필요한 삶의 기술들, 이틀테면 머리를 자르는 일, 텃밭을 가꾸는 일, 빵 굽는 일, 옷을 지어 입는 일 등은 제대로 할 줄 알게 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 잘하지 못하니 실수하거나 실패하면서 괜히 시간을 낭비하는 것 같고, 망친 머리를 수습하러 미용실에 방문하여 이중으로 돈을 쓰는 것 같은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도 나는 일단 무엇이든 손수 해보려고 한다. 자꾸 해봐야 늘기 때문이다. 계속 경험하면서 공부하고 연마하지 않으면 영영 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학원에 가서 배우고, 동영상을 보면서 따라 해도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직접 몸으로 부딪혀서 해보는 것.
앞머리를 자르다가 맹꽁이도 되어보고, 애지중지 키우던 작물이 다 죽기도 하고, 돌처럼 딱딱해서 이가 부러질 것 같은 빵도 구워보고, 삐뚤빼뚤한 박음질에 웃음이 새어 나오는 옷도 입어 보면서 나의 자립력을 키워간다.
돈이면 거의 모든 게 해결되는 세상에서 하나라도 더 내가 직접 해보는 실험을 뚝심 있게 이어간다. 언젠가 도시에서의 돈벌이를 모두 내려놓고, 산속으로 들어가 작은 생활을 이루며 살 수 있는 타이밍이 왔을 때, 생활비가 지금보다 절반으로 뚝 떨어져도 흔들리지 않고 내가 원하는 모습의 삶을 꾸려가기 위해서 오늘도 차근차근, 연습해나간다.
* 더 많은 이야기는 <나만의 리틀 포레스트에 산다>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