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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이 이혜림 Apr 05. 2024

2퍼센트 부족한 빵


동이 틀 무렵이 눈을 뜨고 이불 밖으로 나왔다. 방바닥을 딛는 발바닥에서부터 느껴지는 서늘한 기운. 침실 문을 열고 주방으로 나가니 차가운 공기가 얼굴을 휘감는다. 어느새 호 하고 불면 입김이 나오는 계절이 왔다. 이럴 땐 빵을 구워야지. 베이킹은 오늘의 계획에 없는 일이지만, 겨울에는 빵이 가장 맛있으니까.


기억을 더듬어 천천히 치아바타 반죽을 하고, 두어 번의 발효 과정을 거친 뒤 빵 모양을 성형했다. 성형한 반죽을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발효시킨 뒤 오븐에 넣고 20분만 기다리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치아바타가 완성된다. 


빵을 만드는 동안에는 언제나 주방 구석에 자리 잡고 앉아 책을 읽는다. 반죽의 발효를 기다리며, 빵이 구워지기를 기다리며 짬짬이 틈새 시간에 읽는 책은 언제나 감질나서 더 재밌다. 어스름했던 주방에 볕이 들어오면서 새벽의 고요한 기운이 사라지고 활력 넘치는 아침이 시작될 즈음 빵도 함께 완성된다.





갓 구운 빵의 고소한 냄새는 곤히 자고 있는 남편도 침대에서 벌떡 일으킬 만큼 맛이 좋다. 한 김 가볍게 식힌 빵을 손으로 쭉쭉 찢어 벅으면 그 어떤 산해진미가 부럽지 않다. 고작 밀가루, 올리브유, 소금, 이스트만 넣고 만든 아주 단순하고 거친 빵이지만, 새벽의 시간이 스며든 만큼 깊은 맛이 난다. 참을 수 없는, 아주 근사한 맛. 이 맛을 한번 느끼고 나면 도저히 다른 빵을 먹을 수가 없게 된다. 시즌마다 유행하는 빵의 화려하고 자극적인 맛에 잠시 한눈파는 일은 있어도, 결국에는 다시 집에서 만든 단순한 맛의 거친 빵으로 돌아오고야 만다. 


갓 구운 단순한 빵의 매력에 빠진 건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던 때다. 빵이 주식인 나라인 만큼 순례길 위에서는 바게트와 호밀 빵처럼 담백하고 단순한 맛의 식사용 빵을 쉽게 사먹을 수 있었는데, 버터와 설탕이 듬뿍 들어간 초코 빵, 슈크림 빵, 소보루 빵 같은 종류의 빵을 선호하던 우리 부부에게는 영 내키지 않았다. 그러다 우연히 작은 마을을 지나다 고소한 빵 냄새에 홀려 작은 빵지에 들어갔다. 거기서 투박한 모양의 갓 구운 바게트 빵을 하나 샀다. 그날은 우리 부부가 좋아하는 빵 종류가 완전하게 바뀐 역사적인 날이 되었다. 


스페인 현지에서 갓 구운 바게트는 무얼 찍어 먹거나 내용물을 끼워 먹지 않아도 그 자체로 이미 완벽하게 맛있었다. 갓 구운 바게트는 딱딱한 겉면을 잡고 손에 힘을 주어 쭉 잡아당기면 부드러운 속살이 드러나며 찢어진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하고 쫄깃해서 씹는 재미도 있고, 씹을수록 밀 특유의 단맛과 고소함이 느껴졌다.


진짜 맛있는 걸 먹으면 단순하게 맛있다는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다던데, 그 시절 내가 먹었던 바게트 빵은 정말 맛있었다. 값도 1~2유로로 저렴했고 덕분에 부담 없이 매일 사 먹었다. 

커다란 순례 배낭의 오른쪽 주머니에 그날 아침에 갓 구운 바게트 하나, 왼쪽 주머니에 착집 100퍼센트 오렌지주스 한 통을 꼽고 다니면 하루 종일 길을 걸으며 식당 하나 만날 수 없다 해도 개의치 않았다. 바게트를 씹고 주스 마시면서 걸으면 되니까.



순례길, 남편의 배낭에는 언제나 커다란 바게트가 꽂혀 있었다


한국에서 돌아온 이후 스페인에서 먹던 바게트가 종종 생각났다. 어떤 맛인지, 어떤 모양인지, 결코 뽐내는 일 없이 그저 고소하고 담백하던 맛의 빵이 그리울 때마다 바게트가 유명한 빵집들을 찾아다녔다. 그러나 어디에도 그때 먹던 그 맛은 없었다. 게다가 어찌나 비싸던지, "고작 식사 빵 주제에!"라는 말이 목구멍 앞까지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곤 했다.




이럴 거면 내가 집에서 만들어 먹겠다며 호기롭게 오븐을 샀다. 고구마를 굽는 것으로 오븐을 개시하고서 나는 매일 빵을 구웠다. 빵 굽기를 연습했다는 말이 더 정확하겠다. 빵순이와 빵돌이가 사는 집인 만큼 우리 부부가 먹는 빵을 온전하게 자급자족해보겠다는 마음으로 매일 굽고 또 구웠다.


어느 날은 빵이 돌처럼 딱딱하게 만들어져서 이가 나갈 뻔 하고, 어느 날은 빵이 떡처럼 질어지고, 또 어느 날은 밀가루 냄새가 너무 많이 나서 도저히 먹지 못하고 쓰레기통에 넣기도 했다. 그렇게 여러 번 연습하고 또 연습하면서 홈베이킹 실력이 조금씩 나아졌다. 3년쯤 지나니 내 취향의 맛을 내는 반죽 스킬도 생겼다. 어디에 내다가 팔 수는 없지만, 남편과 내가 맛있게 먹고 지인에게 선물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치아바타를 구울 줄 알게 됐다. 더불어 빵집에 드나드는 날도 드물어졌다.


당연히 사 먹어야 되는 줄 알았던 빵을 집에서 직접 구워 먹게 되면서 시판 제품을 사서 쓰던 다른 먹을거리도 자연스럽게 직접 만들어 먹기 시작했다. 핫케이크가 먹고 싶어서 마트에 가서 시판 완제품 핫케이크 가루를 집어 들던 날, 원재료명을 찬찬히 읽어보다가 처음으로 의문이 들었다.


'이 모든 원재료가 우리 집에 다 있는데 나는 왜 이걸 사 먹으려는 거지?'


그래서 시판 가루를 사지 않고 집으로 돌아와 밀가루, 설탕, 소금, 베이킹파우더, 달걀, 우유를 넣고 반죽을 만들어서 핫케이크를 구웠다. 팽창제, 유화제, 합성향료가 들어 있지 않은, 어떻게 보면 가장 순결하고 깨끗한 핫케이크 반죽을 직접 만들어 먹은 것이다.


비싼 돈 주고 사서 먹던 수입산 그래놀라도 원재료명을 보며 뭐가 들어가는지 확인한 뒤 집에서 질 좋은 국산 통곡물을 듬뿍 넣어 만들었다. 그 후 그래놀라와 환상의 짝궁인 그릭 요거트와 아몬드 브리즈도 직접 갈아 먹을 수 있음을 알게 된 나날이 이어졌다.


신세계가 열렸다. 당연히 마트에서 사 먹어야 하는 줄 알았던 것들을 손수 만들어 먹을 수 있다는 데서 오는 쾌감과 희열. 하나씩 만들어 먹는 게 늘어갈수록 자신감도 나날이 상승했다.

집에서 만든 치아바타, 집에서 구운 당근 케이크, 집에서 발효한 요거트, 집에서 구운 그래놀라... 집에서 내가 만든 것들은 모두 어딘가 2퍼센트씩 부족하게 느껴졌다.

처음엔 내 요리 실력을 탓했고, 그다음에는 집에서 만들어서 그렇다며 '이래서 사람들이 사 먹는구나'하고 납득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더 지나 가만히 생각해보니, 집에서 만들었기 때문에 맛이 부족한 게 아니라, 화학 첨가물과 향미 증진제, 인위적인 향들이 첨가된 마트표, 공장표 음식에 익숙해진 나의 입맛이 문제였던 것 같았다.


집에서 만들어 먹는 음식 종류를 늘리면서 사먹으며 익숙해진 맛의 기준을 하나씩 지워나갔다. 주병에서 보내는 시간이 아까워 공장에 이주를 주었던 나의 먹거리를 다시 나의 주방으로 하나씩 들여오기 시작했다.

음식을 만들어 먹는데에 있어 조금 더 자유로워졌다.오늘은 이런 맛의 음식을 먹고, 내일은 저런 맛의 음식을 먹으면서, 매일 같은 요리지만 다른 맛의 음식을 먹는다 하더라도 그건 그런대로 그 맛이 있다며 끄덕끄덕 받아들이고 먹게 됐다. 


최고의 맛을 먹고 싶은 욕구나 음식에 대한 열정이 없는 둔한 혀를 가진 사람이라 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요점은 매일 당연하게 빵집에 가서 돈 주고 사서 먹던 빵을 이제는 질 좋은 국산 통밀가루를 사다가 직접 집에서 만들어 먹고 있다는 것이다.


마트에서 생크림이 할인하면 그 주에는 스콘을 굽고, 텃밭에서 당근을 수확한 주에는 담백한 당근 케이크를 굽고, 제주산 레몬이 나오는 철에는 레몬 케이크를 굽고, 아무것도 없을 때는 만만하지만 맛있는 치아바타를 굽는다. 과자도 건강하게 먹고 싶은 마음에 압착 귀리와 건크랜베리를 넣은 오트밀 쿠키를 굽고, 가끔은 초코칩 듬뿍 넣은 아몬드 쿠키도 굽는다. 얇게 슬라이스한 감자에 올리브유와 가는 소금 살짝 쳐서 오븐에 구우면 마트에서 파는 감자칩보다 건강하고 맛있는 감자칩이 완성된다.


갑자기 빵이나 과자가 먹고 싶을 때, 옷 챙겨 입고 마트로 달려 나가는 대신 주방 앞에 서서 뚝딱 만들어 먹으면 되는 단순한 생활. 새로운 자유를 얻었다.



초코칩 쿠키 




텃밭에서 수확한 당근으로 구운 당근 파운드케이크 



생크림 할인하는 날에만 굽는 생크림 스콘 




봉긋하게 빵이 구워지는 고소한 새벽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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