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메이 이혜림 Apr 10. 2024

천천히 흐르던 그날 밤



저녁 식사 준비를 하고 있던 밤, 순간적으로 확 고요해지면서 온 집안이 깜깜해졌다. 정전이었다.


전력 차단기 퓨즈만 다시 올리면 되는 줄 알고 처음에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주방에서 요리를 하고 있던 남편 대신 내가 저벅저벅 전력 차단기 쪽으로 걸어갔다.

차단기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다른 집 동태를 살펴보려고 현관문을 빼꼼 열어보니 갑작스러운 정전으로 복도가 소란스러웠다. 그제야 심각성을 깨달았다. 아, 진짜 정전이네.




암흑 속에서 둘이 멍하니 있다가 일단 하던 요리는 마저 끝내려고 캠핑할 때 쓰는 조명을 꺼 냈다. 가장 밝게 밝혔다가 이 정전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 모르니 배터리를 아끼기 위해 밝기를 조금 줄였다. 그런데 꺼진 가스 불이 다시 켜지지 않았다. 처음 불을 켤 때 전기가 필요한 모양이다. 캠핑할 때 쓰는 버너도 꺼냈다.




너무 어두워서 채소가 다 익었는지 잘 안 보인다는 남편을 위해 조명을 팬 가까이 들고 비춰주고 있는데 갑작스러운 이 상황을 굉장히 진지하게 임하고 있는 우리 둘의 모습이 너무 웃겨서 빵 터져 웃었다.

어두컴컴한 주방에서 청각과 후각은 보다 예민해졌다. 기름에  볶아지는 채소 냄새가 유난히 고소했고, 볶는 소리는 꼭 하늘에서 쏟아지는 빗소리 같았다. 그동안 숱하게 채소를 볶으면서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각이었다.


금방 해결될 줄 알았던 정전 사태가 시간이 지나도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자, 나는 집 안에서 전기가 나가면 챙겨야 하는 것들을 헤아려보았다. 가장 걱정되는 건 냉장고인데 냉장실에는 고춧가루와 된장, 채소,과일. 냉동실에는 냉동 과일, 참깨, 고춧가루, 멸치 그리고 얼음이 전부라서 한시름 놓았다.


밥을 다 먹고 난 뒤에도 정전은 계속되었다. 처음에는 작은 캠피 좀여 하나만으로는 생활하기가 너무 어두침침하다고 생각했는데, 밥 먹을 때도 충분했고 뒷정리할 때쯤엔 불편함 없이 아주 밝게 느껴졌다. 내 눈이 은은한 밝기에 익숙해진 탓이었다. 옛날에는 형광등 하나 없이 어떻게 살았을까 싶었는데, 정전을 겪고 보니 그땐 그 나름대로 불편함 없이 잘만 살았겠구나 싶다. 


설거지를 하려고 보니 찔끔찔끔 나오던 물도 멈췄다. 정전에 단수,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핸드폰 배터리 잔량도 간당간당하다. 전기가 다 나가버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집. 내일은 엄마 생신 모임으로 친정에 가야 하는데. 이럴 바엔 차라리 지금 미리 친정집에 가서 하룻밤을 잘까 싶었다.


"엘리베이터 안 되잖아. 지하 주차장까지 걸어 내려가야 해."

"맞다. 근데 주차장 출입문도 자동문이라 안 열릴 텐데?"

"맞네, 주차장 출입구 차단기도 전기라서 안 올라갈 텐데?"


그동안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부분들도 모두 전기를 통해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전기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집이 아니라 전기가 없으면 돌아가지 않는 세상에 살고 있구나.


신선한 충격이었다. 머릿속으로만 생각해본 것과 직접 몸으로 겪어보는 '전기 없는 시간'은 확실히 달랐다. 전기에 의존하고 사는 삶은 전기가 사라진 순간, 순식간에 무력해진다. 

우리는 이왕 이렇게 된 거 정전 상태를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24시간 상주하는 관리인이 없는 아파트라서 이 갑작스러운 정전과 단수가 얼마나 오래갈지 가늠할 수 없지만, 그냥 오늘만큼은 되는대로 지내보기로 한 것이다.


테이블 위에 놓인 작은 캠핑 조명마저 껐다. 남편은 윙 체어에 기대어 눕고, 나는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간 안에 그저 머물러보았다.


전기가 흐르지 않는 우리 집에는 침이 꼴깍 넘어가는 소리가 다 들릴 만큼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비가 쏟아지는 창밖에서 어스름한 밤의 불빛이 스며들었고, 깜깜하게 느껴지던 방 안은 어느새 부드러운 빛으로 가득 찼다. 아무것도 보잊 ㅣ않던 거실의 풍경이 조금씩 선명해졌다.


민감해진 감각을 활짝 열고서 정적의 순간을 경험했다. 사라진 전기 대신 넉넉한 여유를 선물 받은 것처럼 천천히 흐르는 밤 시간이 꽤 좋았따. 이 느낌을 받기 위해 그간 숱하게 자연을 찾았는데, 그걸 도심 속 우리 집에서도 받을 수 있다니.


화장실에 다녀온 남편은 불이 켜지지 않는 욕실 안에서 문을 닫고 앉아 있으니 온통 암흑이라고, 대책 없는 무서움과 편안함을 동시에 체감하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고 말했다.


다행히 두세 시간이 더 지나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다시 전기가 들어왔다. 욕실 환풍기가 돌아가기 시작하고, 냉장고의 낮은 소음이 들리고 구석구석 와이파이가 흐르고, 집이 대낮처럼 환해졌다. 


더 이상 창밖의 빗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은은한 밤의 달빛이 사라졌으며, 고요했던 마음은 자취를 감췄다. 우리 집은 그렇게 평소의 저녁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나는 분명 정전 전과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몰랐던 것을 이제는 알게 된 사람.


세 시간의 정전으로 갑자기 전기 없는 삶을 살겠다느니, 그런 거창한 다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조건부적 삶을 살지 않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어떤 조건이 있어야만 충족되는 삶은 그 조건이 사라지면 너무나도 무력해진다. 전기에 의존하고 살던 삶에서 전기가 사라지면 나는 살아갈 수 없게 되는 것처럼.

한 달에 한 번씩 '전기가 없는 하루'를 만들어볼까. 집 안의 전력 차단기를 내리고 전기가 흐르지 않는 집에서 하루를 지내는 거야. 오늘의 이 경험을 잊지 말자는 실험으로.





더 많은 이야기는 <나만의 리틀 포레스트에 산다> 책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