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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이 이혜림 Oct 14. 2020

이사를 왔다. 다시 시작된 나의 작은 집, 미니멀 일상

오후에 들어온 깊숙한 햇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미니멀 라이프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동네로

이사를 왔다.

잠시 서울 호캉스 즐기려고 서울에 올라왔다가,  

남편 혼자 부동산 가서 세 군데 둘러보고

가장 마음에 드는 집으로 콕 집어 계약하고서.


옷과 세면도구, 개인 소지품 담긴 작은 캐리어 하나를 끌고

호텔 체크아웃을 하고,

그렇게 총총총 입주를 했다.

부동산 사장님이

"혹시 가져 올 짐이 그게 다는 아니죠?"라고 할 정도로

너무 가볍고 단출하게

그렇게 찾아온 집. 푸하하  




올해 초에 세계여행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는데,

귀국한 지 5개월 만에

그토록 바라던 우리의 보금자리가 생겼다.  

한국에서 보내는 5개월간,

무수히 많은 일들이 일어났으며,

이제는 그 모든 일들이 과거가 되었다.


언제나 중요한 건 현재.

지금, 우리 부부는 작지만 아늑한 집이 생겼고,

이 순간, 새로 만난 이 동네가 아주 마음에 든다.




처음 이 집을 만난 날.

풀옵션 오피스텔이라서

딱히 새로 뭔가 사야 할 게 없어서 다행이었다.

세계여행 떠나기 전,

집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살림살이를 팔아 처분했기에

다시 시작하려면 모든 게 돈이었다.  


그런 우리에게 나타난 구세주..!  


세탁기, 냉장고, 에어컨, 책상, 식탁,

전자레인지, 빨래건조대, 옷장, 선반, 창고까지(!)

모든 것들이 다 옵션으로 있는 오피스텔 만세!





시이모님이 물려주신 살림살이들과,

남편이 혼자 자취할 때 구입해 쓰던 자취용품들로 지냈던

1~2년 차의 신혼생활.   





열흘~ 한 달씩 렌트해서

에어비앤비 호스트 살림살이들로 생활했던,

신혼 3년 차, 세계여행 중.  




심지어 뉴질랜드에서 한 달간 캠핑카 여행할 적에도

내가 구입한 물건은 1도 없고.

모두 다 캠핑카 회사 물건들로 신혼생활 :)    



/


  

며칠 뒤면 어느덧 3주년 결혼기념일.

꽉 채운 신혼 3년간 남의 살림살이들만 사용했네-

예전에 누군가 내게 물은 적이 있다.

다들 신혼집 처음 꾸릴 때 여자만의 로망이 있는데,

너는 어떻게 그런 걸 포기하며 살 생각을 했냐고.

더 중요한 게 있다고 대답했다.

내겐 번듯한 신혼집, 값비싼 브랜드의 가전 가구들,

멋진 인테리어 소품들보다

더 지키고 싶은 것, 중요한 게 있었다고...  

결혼반지 대신 양가 부모님 건강검진을 택했고

근사한 아파트 전세살이 대신 세계여행을 택했다.

그리고 지금의 내가 있다.

미니멀 라이프로 단련된 심신,

세계여행으로 단련된 돈독한 부부 사이,

여전히 젊어서 뭐든 할 수 있는 나와 남편.  

이것만으로도 3년간 나의 결혼 생활

그리고 나의 미니멀 라이프는

대성공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덧,


3년간 남의 살림들만 주야장천 사용해가며

나의 취향을 잘 알게 되었다.

보통은 신혼 때 내 돈 주고 물건을 사서

써가면서 실패도 하고 겪어가면서

차츰 나의 살림 취향을 알아갈 텐데  

나는 모두 다 남의 물건으로 생활했으니

0원으로 내 살림 취향을 파악했다.

굉장한 절약 아닐까. 하하    




입주 첫날.

옷가지 몇 개와 간단한 세면도구만 들어있는

캐리어 하나 달랑 들고 왔으니.

이부자리도 변변치 않았다.


마트에서 급하게 사온 새 수건을 베개 삼아

여름 이불 하나 구입해 깔고 잤다.


덮고 잘 이불이 없어서

남편은 주섬주섬 긴팔 긴바지를 입었고,

나는 기장이 긴 원피스를 이불 삼아 덮었다.

뭔가 궁상맞은 모습에 둘이서 빵 터져서

한동안 깔깔거리고 웃었다.


모두 추억이 되었다.  


물론 지금은 고심해서 고른 토퍼를 깔고

매우 아늑하고 편안한 잠자리에서 잔다.


맨바닥에서 잤던 경험 덕분에

토퍼에 누울 때마다 우리 부부는

굉장한 행복감에 젖는다.     




나와 우리 집에게 시간을 주고 싶었다.


물건을 하나 사더라도

뜸을 들이고, 천천히.

꼭 필요한 것들로

온전한 나의 취향의 물건들로

신중하게 구입하고 싶었다.

소중히 아껴가며 오래오래 사용하고 싶은 마음으로.     





의자 하나를 구입하는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풀옵션으로 식탁이 있지만

의자가 없어서

한동안 맨바닥에서 밥을 먹어야 했다.


머리를 조금 굴려서

캐리어를 바닥에 깔고

그 위에 여분의 베개커버를 올렸다.    




멋진 좌식 테이블이 되었다.

이곳에서 시원한 비빔면도 먹고     




나 혼자만의 티타임도 즐겼다.    




때로는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작은 테이블과 의자가 되어주었다.

얼음 동동 띄운 매실 에이드와 아몬드

책 한권만 있으면,

여기가 바로 카페.    




계단은 7개 정도로 넉넉하니

남편과 내가 각각 개인 테이블로 써도 충분했다.^^     




이층에 있는 난간조차도

우리에게 근사한 테이블이 되어준다.


밤 산책 후,

각자 맥주 하나씩 사 와서

요즘 푹 빠져서 보고 있는 하트 시그널 즐기기.    




삼시세끼 켜놓고

파전, 부추전으로 저녁을 해먹기도 하고.     




아침에 늦잠 자면

남편이 이곳으로 브런치를 대령해주기도 했다.

뭐든 내가 활용하면 그만!


바닥 위, 선반 위, 계단 위 공간을 비워놓으면

그 자체가 의자가 되고 테이블이 된다.  

없으면 없을수록, 창의력이 퐁퐁 샘솟는다.    





어떤 물건은 이미 가지고 있음에도

더 좋은 것, 더 큰 것, 더 괜찮아 보이는 것을

원하게 될 때도 있다.


이 집에 옵션으로 있는 빨리 건조대가

아주 작은 미니 사이즈다.

반팔 티셔츠 하나 펴서 널지 못할 만큼.


큰 건조대를 하나 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가만 보니,

우린 지금껏 세계여행하면서

건조대 하나 없이

매일 그날 입은 옷, 손빨래해가면서도

일 년을 잘 지냈더라.     




건조대가 작다면,

세탁기를 더 자주 돌리면 될 뿐이다.


집에 있는 모든 공간 자체를

건조대로 잠시 활용하면 될 뿐이다.


정말 그거면 되었다. 신기하게도.

우리는 미니 건조대로도 충분했다.     




요가매트를 두 개 구입했다.

+ 푸시업 바도 구입.


나름 남편의 로망이었던 홈트레이닝 시설을

아주 간단하게 만들어주었다.

돌돌 말아 옆에 두었다가

펼치기만 하면 이곳이 바로 요가원, 헬스장이 된다.  

무궁무진한 매력이 있는 우리 집의 텅 빈 거실이다.





쏘카를 빌려 타고 친정집에 가서
세계여행하며 맡겨놓은 우리의 살림들을

모조리 가지고 오던 날 밤.  


이제 진짜 이삿짐 푸는 날.^^  


"신혼 3년 차인데, 우리 진짜 짐 간소하다.

승용차 하나로 이사 다닐  있다니! 하하"  


그러나 막상 풀어보니, 꽤 잡다한 물건들이 많았다.

더 이상 필요 없는 것들을 모아서 또 한 번 비웠다.

우린 조금 더 가벼워졌다.     





앞으로도 많은 것을 채우고 살지 말아야지.

혹, 무언가를 갖게 되더라도 너무 집착하지 말아야지.

곁에 두고 쓸 땐 소중하게, 기쁜 마음으로 쓰다가도

비우고 돌아서야 할 때, 너무 슬프거나 아깝지 않도록

딱 그만큼만 나의 물건을 아껴줘야지.


물건보단 빈 여백을,

빈 여백보단 나 자신을 더 사랑해야지.  


텅 빈 방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그런 생각을 자주 했다.


오후까지도 깊숙하게 들어오는 햇살

빛이 만들어내는 그림액자.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했다.   





조용한 방안,

덩그러니, 나 혼자.


책을 보다가 창 밖으로 시선을 옮긴다.

아파트 외에는 특별히 뭐가 보이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창 밖을 바라볼 때마다 마음이 편안해진다.





눈에 거슬리는 게 아무것도 없다

마음에 걸리는 게 아무것도 없다


이런 순간을 오롯이, 더 자주 느끼기 위해서

미니멀 라이프를 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텅 빈 공간이 좋은 이유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서 좋은 게 아니라,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뭐든 될 수 있어서 좋은 거다.


캐리어 하나 내려놓고 커버 툭 깔아 두면

런치타임을 즐길 수 있는 근사한 식당이 되고,


요가매트를 툭 펼쳐놓으면

창가로 햇살이 촤르르.. 들어오는

나 혼자만의 멋진 홈트레이닝 공간이 되어주고.


빨래를 탁탁 옷걸이에 걸어 널어두면

하나의 기능에 충실한 빨래방이 되기도 하고,


차 한잔 우려내어

벽에 기대고 앉으면

어느 명상실 부럽지 않은

고요한 공간이 되어준다.


청소는 그저 매일 아침저녁으로

면포 한 장 끼운 밀대로 쓱쓱 2분 밀고 다니면 끝!


바닥에 걸리적거리는 거 없고

청소하기 전 정리해야 할 물건들 없으니

간단하고 편리해서 더 자주 청소하게 된다.





텅 빈 공간이 주는 여유로움과

여백과 빈 벽이 주는 단조로움에

단 한 번이라도 매료되어본 사람이라면,


텅 빈 공간과 여백을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수많은 잡동사니들을 옆구리에 끼고서

복잡한 일상 속에서 살다가도

불현듯 빈 벽과 여백을 그리워한다.


그리고 결국 다시 돌아가게 된다.

단순한 삶과 가벼운 일상 속으로.


그렇게 나도 텅 빈 공간으로 돌아왔다.

나의 미니멀 라이프가 다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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