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려움 조차 감사

2월 10일의 감사일기

by 메리언

2월 10일(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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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도 교무로서 운영위원회 안건 발표가 있어서 출근을 했다. 하나 둘씩 점점 부담감이 다가온다. 2년 교무하고, 1년 쉰 것 뿐인데도 왜이리 다 처음하는 것 같이 뚝딱거리는지 모르겠다.


나보다 10살 많은 친구 루가님은 나에게 오늘 뜬금 없이 '조금 천천히 걸으세요'라고 조언해주셨다. 내가 아무 말도 안했는데...! 루가님의 통찰력 멋지다. 내가 요새 폴짝폴짝 빨리 뛰려는 경향이 있었다. 나보다 10,000그릇의 밥은 더 먹은 루가님의 말을 따라야겠다.


조금 천천히 걸으며, 누군가의 어깨가 되어주는 교무로서 일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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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하는 길에 클래식 FM에서 나오는 가곡을 들으며, 겨울에 자주 볼 수 있는 회색 구름을 관찰했다. 가곡과 회색의 구름이 잘 어우러져서 가슴이 무언가로 가득 차는 느낌이 들었다. 출렁출렁. 살면서 이런 느낌을 받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으로 산다는 건 축복받은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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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있는 과학실은 돌바닥이라 겨울과 이른 봄에는 추워서 오돌오돌 온몸이 떨리는 곳이다. 겨울 내내 이곳에 잠시라도 있기가 싫어서 잘 들어오지 않았는데, 오늘은 어쩔 수가 없어서 오자마자 씩씩하게 환기하고, 온풍기를 틀어 점점 과학실을 덥혔다. 공간을 따뜻하게 도와주는 기계들이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 세상에 사는지. 옛날 역사책들을 보면 민중들의 겨울 나기가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 요즘 같이 패딩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얼마나 얇은 옷에 덜덜 떨어야 했을지... 씻을 수도 없어 온몸이 얼마나 가려웠을지...


몇년 전 읽은 베르나르의 소설 꿀벌의 예언에서 주인공이 중세시대로 가서 가장 처음 느끼는 감각이 가려움이었다. 평생 아토피와 지루성 두피염으로 고생하는 나에게 가려움은 정말 모기 같이 성가시고 힘든 존재, 그러나 같이 살아야 하는 존재이다.


그래도 내게는 스테로이드 연고나 진정 연고들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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