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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머쉬 May 09. 2023

소작농 아버지

난 무엇을 물려 줄 것인가?


우리 아버지는 지리산 산골짜기에서 농사를 지으셨다

당시에는 땅이 너무너무 귀했다. 농사를 짓고 싶어도 땅이 없기 때문에 농사를 지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남의 산을 개간해서 논을 만들어 농사를 짓는 소작농의 삶을 살게 된다.


산을 개간해서 논을 만든다는 것은 엄청난 중노동이 필요하다.

지금은 포클레인이나 중장비가 있기 때문에 쉽게 가능하지만 당시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오로지 사람손으로 일을 다 해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우리 집에는 소를 키웠고 달구지를 이용해 무거운 돌을 옮길 수 있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매일같이 논을 개간하고 논에서 돌을 골라내야 했다.

논에 돌이 있으면 쟁기질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시에 얼마나 힘들었던지 아무리 논에서 돌을 주어도 주어도 끝도 없이 돌이 나왔다.

일이 너무 힘드시다 보니 아버지는 술을 드시고 일을 하셨다.

매일 해가 저물 즈음이면 얼근히 취하셨고 들녘에서 잠이 드신 경우도 많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버지를 찾으러 밤에 산기슭을 찾아 헤맨 적도 많았었다.

그렇게 몇 날 며칠을 힘들게 개간해서 논을 만들었다.


그리고 가을이 돼서 마침내 첫 수확을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감격하며 눈물을 흘리셨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난다.

나는 어릴 때 아버지에게 이렇게 물었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 이렇게 많은 쌀을 수확했는데 우리는 이제 부자야?

아버지는 나의 물음에 빙그레 웃으시면서 말씀하신다.

몇 년만 고생하면 우리도 부자가 될 거야

그리고 수확한 쌀의 10가마니 중 4가마니를 구르마에 싫으시고 집으로 향하지 않고 우리 동네에서 가장 부자인 00이 네로 향하는 것이었다.

아버지 왜 우리가 열심히 수확한 쌀을 왜 이 부잣집에 주는 거야?

응 우리가 만든 논이 이 00이네 땅이니까.

하지만 우리가 만들었잖아.


산을 우리가 논으로 만들었는데 우리 것 아니야?

아니 원래 땅 주인이 00이네 거야.

우리 땅도 아닌데 왜 힘들게 논으로 만들었어?

우리 땅에 만들어야지.

아빠는 엷은 미소만 보이고 아무 말이 없으셨다.

당시에는 몰랐다. 왜 남의 땅을 힘들게 논으로 만드는지를...


중학생 사춘기가 돼서야 알았다. 그렇게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도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힘들게 개간한 땅에서 안정적인 벼농사로 수확을 했고 다시 봄이 와서 모를 심고 여름으로 향하고 있었다.

장마철이 다가왔다. 비가 일주일 내내 오고 있었다.

나는 엄마가 해주는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놀고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돌아오신다.

개간한 논 제방 둑이 무너졌다는 것이다. 엄마, 아버지 그리고 나는 부랴부랴 논으로 나갔다.

개천이 범람해서 벼를 심었던 논에는 벼 끝만 보이고 온 천지가 물바다로 변해 있었다.

제방이 터진 진 흙탕물이 어렵게 개간한 논을 다 덮어 버렸다.

나는 아빠에게 물이 저렇게 많이 차면 어떡해?

물이 빠지면 그래도 벼는 자라는 것 아니야?

병이 들어서 수확을 할 수 없어.

올해는 수확을 못할 것 같구나.

그래? 그럼 내년에 다시 심으면 되지 뭐?

아빠 너무 걱정하지 마.

나는 아빠를 위로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빠의 표정은 더욱더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렇게 폭우는 지나갔다. 아버지와 나는 침수된 논으로 향했다.

그리고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논이 자갈밭으로 변해있었다.

크고 작은 돌들과 모레로 논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아버지는 한숨을 쉬셨다.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 어떻게 해?

다시 저 많은 돌들을 옮겨야 하는 거야?

아버지 표정이 무거웠다. 아버지는 뭔가 결심한 듯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 땅 주인 부잣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셔서 어머니에게 이렇게 이야기하신다.

여보 그 땅에서 소작 못할 것 같아.

그래서 그 00이네 아버지에게 소작 포기한다는 계약서를 쓰고 왔어.

어머니는 눈물이 주르르 흘리신다.

그렇게 아버지는 나 보고 막걸리를 사가지고 오라고 심부름 시키시고 방으로 들어가신다.


그리고 몇 개월이 지나갔다.

장마 피해를 입은 농민들에게 정부에서 피해 보조금을 준다는 이야기를 이장님으로부터 듣게 된다.

아버지는 읍내 면사무소를 방문하고 돌아오신다.

하지만 얼굴빛이 좋지 않다.

어머니가 물어보신다. 어떻게 됐어요? 여보

피해 보상은 땅주인에게만 준대.

소작농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는데 더군다나 우리는 소작도 포기를 했기 때문에 해당이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고.

어머니는 흙바닥에 덜썩 주저앉아 눈물만 하염없이 흘리신다.

아버지는 며칠을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술로 보내셨고 어머니와 자주 싸우셨다.

이것이 소작농의 설움이구나.

나는 그때 깨닫게 된다.

무엇을 하더라도 내 땅에서 해야 한다는 것을..

40년이 지난 지금도 당시에 아버지가 술로 보낸 시간과 어머니가 흘렸던 눈물이 아직도 내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하늘나라로 가신 아버지는 올해로 16년이 되셨다.

그렇게 힘들게 고생하시면서 치열하게 사셨던 아버지,

너는 더 이상 소작농의 삶을 살지 말라고 하셨던 아버지

나 또한 직장에 얽매여 소작농의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렇게 고생했는지도 모르겠다.

소작농인 아버지는 힘들게 일구신 논을 한 번의 장마로 인해 너무 쉽게 경작권을 포기하셨다.

그때 조금만 버텼으면 어땠을까? 한 번 더 노력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들을 사춘기 때 많이 했었다. 아버지는 그 뒤로 시골 일을 모두 접으시고 서울로 올라와 막노동을 시작했고 평생을 그렇게 힘들게 살다가 후두 암으로 돌아가셨다.


많은 직장인들이 소작농을 삶이 아닌 부자가 되기 위해 최근에 부동산 투자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갑자기 부동산이 침체되면서 힘들어한다.

고금리에 계속해서 떨어지는 시세,

그리고 전세가 하락으로 인한 역전세,

상황은 설상가상으로 안 좋아지고 있다.

그렇게 어렵게 어렵게 영끌해서 투자를 했는데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다는 이야기를 주위에서 많이 듣게 된다.

모든 것을 팔아버리고 마음 편하게 살고 싶다는 사람들이 주위에 많아지고 있다.

내 주제에 무슨 부자야.. 지금 위치도 감지덕지하지...

그냥 원래 위치로 돌아가서 마음 편하게 사는 게 최고야...

모든 것을 체념하는 듯 하다.


나는 그들을 보면서 과거 내 아버지 모습이 떠오른다.

그때 아버지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과연 당신은 나중에 아이들에게 과연 어떤 아버지로 남고 싶은가?



                                                  머쉿게 살고 싶은 - 머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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