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니카 Apr 08. 2020

하수구 뚫은 하루

혈관 건강에 대해 생각하다..


며칠 동안, 아니 일주일도 더 되었다. 싱크대 하수구가 막혔다. 물이 내려가질 않는다. 


몇일 째, 설거지를 못하고 있다. 설거지가 쌓이고 쌓여서 급기야 대야에 그릇을 담아서 욕조에서 설거지를 할 지경에 이르렀다. 밖에 나가기도 싫고, 귀찮아서 이렇게 하기를 며칠... 도저히 불편해서 이제는 못 견디겠다며, 관리인 아저씨 마리오에게 찾아갔다. 여전히 제자리인 프랑스어 실력으로

"마리오... 하.. 수구.. 막혔어.. 뚫는 도구.. 좀 빌려줄래?"

"아니, 나는 그거 없어."

"이전에 나한테 빌려줬던 그거..."

"그래, 그게 지금은 없어. 내가 주변 이웃들한테 있는지 한번 알아볼게."

평소 관계를 잘 맺어온 터라, 마리오는 내 부탁에 친절히 응해주는 편이다. 포르투갈 중년 남성인 우리 아파트 관리인 마리오는 평소 늘 말이 없는 과묵한 성격의 소유자다. 묵묵히 일하는 그는 그다지 살갑지는 않기에 가까이 다가가기는 조금 쉽지 않은 타입이다. 내가 말을 잘하면 모를까, 불어가 시원찮기에 평소 우리 가족은 여행을 다녀오면 언제든 그를 위한 자그마한 선물부터 챙겼다.

 

도구가 없다니 할 수 없이 윗집 크리스티안느 할머니 댁에 찾아갔다. 80넘은 노인분들이라 웬만하면 찾아가기 조심스럽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조심스레 벨을 누르고, 남편 기 할아버지가 문을 열어주었다.

"기, 우리 집에 하수구가 막혔어요. 뚫는 도구 있으면 빌려주실래요?"

사회적 거리를 두며 마스크를 쓴 채 조심스레 여쭤보았다. 흔쾌히 빌려주셨다. 두 분은 늘 우리 가족을 상냥하게 반겨주시는 분이시다. 그런데 요즘 코로나 사태가 많이 신경 쓰이시는지 나를 조심스러워하는 태도를 보이셨다. 서로가 서로에게 조심스러운 나날들이다. 짧은 안부를 묻는 것으로 대화를 가볍게 마무리하고, 얼른 도구를 챙겨 집으로 왔다.

 



하수구를 뜯어보니 안에 찌꺼기가 나왔고, 악취가 진동했다. 이 도구는 구부러지는 단단한 용수철인데 매우 길다. 이것을 하수구 안에 집어넣어서 마구 긁어댔다.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고, 나는 너무 힘이 들었다. 몇십 번을 긁어대다 다시 물을 틀어도 여전히 물은 잘 내려가지 않았다. 결국, 우리의 슈퍼 마리오, 마리오에게 SOS를 했다. 그는 흔쾌히 와주었고, 긴 용수철 줄을 긁기만 하는 게 아니라 맷돌 갈듯이 마구 돌려댔다. 하수구 관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음식 찌꺼기들이 이 용수철 줄에 의해 하나둘씩 뜯겨 나가는 경이로운 순간이었다. 나는 앞뒤로만 긁어댔고, 그는 휘몰아치듯 마구 휘저어 대는 것이 나와 그의 차이였다. 디테일에서 다른 결과를 자아냈다.


하수구의 물 흐름을 막고 있던 찌꺼기가 마치 사람 혈관에 붙어 있는 찌꺼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에 찌꺼기로 인해 물이 흐르지 않고 막혀서 용수철 긴 줄로 관을 마구 긁어내어 물이 원활히 흐를 수 있도록 하듯이, 우리 혈관도 찌꺼기로 인해 혈액 순환이 원활하지 않아서 아주 극심한 상황에 까지 이르면 병원에 가서 전문 수술 도구로 막힌 혈관을 뚫어서 혈액의 흐름을 원활하게 해주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즉, 혈관이 막혀서 병원에 가지 않으려면 평소 혈액 순환이 잘 될 수 있도록 신경 쓰고 관리를 해야 한다. 운동을 통해 땀을 빼서 노폐물이 쌓이지 않게 하고, 물을 많이 마셔서 혈액을 탁하게 하지 않고, 음식물이 많이 쌓이면 하수구가 막히듯 우리 몸도 막히지 않도록 많이 먹지 않고 소식해야 한다. 나는 그렇게 하수구의 며칠째 막힘과 수고로움, 그리고 뚫는 힘든 과정을 통해 내 몸도 평소 조심하고 잘 관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으면 수고롭게 병원에 가서 돈 주고 아픔을 견뎌내며 혈관 뚫는 날이 올 것이다.

 



마리오에 감사의 뜻으로 20유로를 건네주었다. 마리오는 괜찮다고 하면서도 좋아하는 모습이었다. 어려운 시기에 이렇게라도 서로 감사를 표하고 싶다. 그리고 윗집 할머니 댁에 드릴 감사 선물을 집에서 찾던 중에 이전에 미리 사놓은 보르도 화이트 와인을 발견하고 함께 드렸다. 크리스티안느, 기 부부는 보르도 와인만 마시는 분들이다. 각 집안의 와인 취향에 대해 미리 알아두면 이럴 때 빛을 발한다. 마침 집에 있는 새 와인이 보르도라서 안성맞춤이었다.


하수구 막힌 덕분에(?) 아주 오랜만에 이웃 간에 안부 인사를 하는 날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미래의 인간관계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