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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니카 Mar 18. 2022

프랑스 아이처럼 팩트체크

2013년 출간된 <프랑스 아이처럼>이란 책은 한국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영유아를 키우는 엄마들이 이 책을 많이 읽었다고 한다. 지금도 책 분야에서 프랑스라고 검색하면 판매량 1위로 나온다. 프랑스 육아가 한때 유행했고 지금도 관심이 완전히 사그라들진 않았다. <프랑스 아이처럼>에 나오는 프랑스 아이들은 대체 어떻길래 프랑스 아이처럼 아이를 키우고 싶어 하는 것일까? 책을 여러 번 읽어봤다. 이곳에서 살면서 보고 느낀 점과 실제 책에서 말하는 것과 어느 정도 일치하는지 확인해봤다. 


먼저, 프랑스 아이처럼 책 속 주인공 프랑스 아이들에게 대해 이야기해보자. 

프롤로그에서부터 ‘레스토랑에서 소란을 피우지 않는 프랑스 아이들’이라고 엄청난 문장이 등장한다. 프랑스 아이들은 식당에서 떠들지 않고 조용히 식사를 한다고 알려졌나 보다. 식당에 갈 때마다 나는 매의 눈으로 아이들을 관찰했다. 아이가 유치원에 다니기 전에는 유모차에 아이를 태워 식당에 갔다. 기본적으로 만 1~3세 정도 아기들은 식당에서 조용히 있을 수가 없다. 이 연령대 아이가 식당에서 조용히 있다면 그건 아이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공교육이 시작되는 만 3세가 되면 아이들은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한다. 유치원에서 아이들은 급식을 하는데, 식사 예절도 더불어 배운다. 식사 예절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식당에서 시끄럽게 떠들던 아이들도 점점 식사할 때는 옆 사람에게 방해하면 안 되고 조용히 식사에만 집중해야 한다는 것을 몸에 익히게 된다. 만 4~5세가 되면서 점점 식당에서도 조용히 밥을 먹는 것을 몸에 습득하지만, 모든 아이들이 이렇지는 않다. 심지어 만 6세가 되어도 소란스럽고, 사부작 거리며,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아이들이 있다. 그건 아이의 개별 특성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한국에 비해 식사 공공 예절을 강조하는 프랑스 아이들이 비교적 식당에서 조용히 있을 확률은 높다. 하지만 일반화할 순 없다. 기질 자체가 그런 아이들에게 조용히 잠자코 있으라는 것은 또 하나의 고문이라고 생각한다. 


아이가 생일 초대를 받으면, 생일 파티 현장에 여러 번 함께 했다. 원래 프랑스 생일 파티는 부모들이 아이들만 생일 주최자 집에 보내고 되돌아온다. 한 엄마에게 프랑스 생일 파티 문화에 대해 물으니, 파리가 특히 그렇다고 했다. 자신은 시골 출신인데 시골은 생일날 부모도 함께 있는데, 파리는 대부분 아이만 보내고 바로 나온다고 했다. 나는 아이가 아직 낯선 집에 혼자 두는 것이 불안해서 같이 가서 있곤 했다. 그러면서 아이들을 많이 관찰했는데, 아이들이 뭘 먹을 때는 영락없이 아이다. 정상적이다. 한 번은 미술관에서 생일 파티를 한 적이 있는데, 케익 먹으면서 시끄럽게 떠들고, 일어서고, 옆에 앉은 일행에게 방해가 될 정도로 뛰어다니기도 했다. 만 5세~6세 정도 되는 아이들이었다. 프랑스 아이들이라고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식당, 미술관, 극장 할 것 없이 아이들은 이리 뛰고 저리 뛰어다니기도 한다. 물론 조용하게 잘 있는 아이들도 있지만 모든 아이들의 성향이 제각각 다르기 때문에 개구쟁이 기질을 가진 아이들은 소리도 지르고, 한시도 가만있질 못한다.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참고로, 프랑스에서는 노 키즈존이라고 따로 없다. 한국에서 식당에 갔는데 노 키즈존이라는 곳도 따로 있기도 했고, 식당에 아이들이 뛰어놀 수 있는 아이들 전용 놀이 공간이 마련되어 있기도 했다. 프랑스는 그런 곳은 맥도널드 외에는 보지 못했다. 그만큼 어른과 아이를 구분하지 않고, 동일하게 바라보는 편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아이들이다. 아이들이기 때문에 때로는 떠들기도 하고, 밥 먹다가 소란을 피우기도 한다. 프랑스 아이들이라고 해서 무조건 다 식당에서 조용하게 밥을 먹는 것은 아니다. 테이블 주위에 음식 부스러기 하나 떨어져 있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건 아이의 식사 예절을 떠나 아이라는 고유한 특성을 말살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는 아이다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공공장소에서 너무 시끄럽게 떠드는 것이 옳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아이가 조금 소란스럽게 한다고 꼭 잘못된 것만은 아니다. 


이 책에서 주로 언급하고 있는 것은 프랑스 아이들은 절제할 줄 알고, 떼를 쓰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책이 육아서로 베스트셀러를 넘어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고 있는 데에는 부모들의 바람이 투영된 것이 아닐까. 어린 영유아 아이를 키우는 것은 누구나 힘들다. 이 책에 나오는 프랑스 아이들은 하나같이 말을 잘 들고, 떼를 쓰지 않는다. 그러니 어찌 육아하는 부모로서 혹하지 않겠는가? 프랑스에서 육아를 경험해보지 않고서, 프랑스 아이처럼 책만 보면 프랑스 아이들은 모두 얌전하고, 말 잘 듣는 마치 다른 세상 아이들처럼 느껴진다. 저자는 책에서 ‘프랑스 놀이터에서 수백 시간을 보내는 동안 단 한 번도 악을 지르며 떼를 쓰는 아이를 본 적이 없다.’고 했다. 프랑스에서 아이를 키우는 약 5년 동안 놀이터, 길거리, 마트, 장난감 가게 등 곳곳에서 소리를 지르고, 떼를 쓰며, 심지어 바닥에 드러눕는 아이들을 종종 목격했다. 아이들이 집에 가지 않겠다고 떼쓰기도 하고, 길거리에서 부모와 오랜 시간 실랑이를 벌이기도 하고, 형제자매끼리 치고받고 싸우는 모습도 목격했다. 프랑스 아이들이라고 다를 바 없다. 똑같은 아이들이다. 프랑스 아이들을 과대평가하면 안 된다. 


그럼 프랑스 부모들은 어떨까? 프랑스 부모는 권위를 가지고 아이들에게 고함을 지르지 않으며, 카드르(Cadre)라고 불리는 그들만의 ‘틀’ 안에서 자유를 허용한다고 한다. 아이들도 그 틀 안에서 순종적이라고 했다. 뇌이쉬르센에는 어린아이들을 키우는 가족들이 많다. 우리 집 맞은편에는 2살, 6개월 두 아이를 키우는 프랑스 가족이 살고 있었다(작년에 이사를 갔지만...). 낮이고 밤이고 우리 집까지 자주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조용히 해”, “기다려”, “그만해”, “하지 마”, “안돼” 방음 시설이 좋지 않은 관계로 옆집 대화가 우리 집에 잘 들렀다. 때로는 엄마의 신경질적인 고성이 오갔다. 부부싸움도 심심찮게 들렸다. 아이는 울음이 끊이지 않았다. 엄마가 소리를 지르면 지를수록 아이 울음소리는 더욱 커져만 갔다. 


<프랑스 아이처럼>이란 책에 보면 프랑스 엄마들은 우아하게 아이를 다루며, 권위를 가지고, 소리를 지르지 않으며, 그들만의 카드르 안에서 아이에게 자유를 허용한다고 나온다. 그러나 모든 프랑스 엄마들이 이런 것은 아니다. 내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한국 엄마와 비교했을 때, 프랑스 엄마들은 엄격한 편이다. 별것 아닌 것에도 쉽게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엄마들은 아이들이 “메르씨(Merci/고맙습니다)”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은 것에 대해 훈육을 심하게 했다. 같은 반 친구 E의 엄마 F는 아이가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하지 않으면, 나와 우진이가 있는 앞에서 호되게 야단을 쳤다. 그때 아이는 속으로 많이 무안했을 테다. 그렇게까지 예절 교육을 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것은 예절 교육이 아니라 아이의 수치심만 유발하는 역효과를 낳는다. 엄마에 대한 반감을 키우게 된다. 


또한, 엄마들끼리 대화를 하고 있을 때, 아이가 말을 하려고 끼어들면 대부분의 프랑스 엄마들은 아이들에게 목소리에 강한 힘을 실어 “어른들이 얘기하고 있을 때는 끼어들면 안 돼”라고 딱 잘라 말했다. 아이들은 엄마에게 뭔가 자랑하고 싶을 수도 있고, 이것은 꼭 말해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른들은 그들의 세계와 아이들 세계를 어느 정도 구분하려는 듯 보였다. 나는 이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는 모르겠다. 어른의 권위를 세우고, 

아이들을 엄격하게 다루는 것이 부모와 자녀 사이 애착관계를 형성하는데 방해가 될 수 있다. 어린아이들은 부모와의 정서적 교류가 중요하다. 프랑스 엄마들을 대부분 일을 한다. 오후에 아이를 픽업하러 유치원에 가면 대부분 베이비시터가 와서 기다리고 있다. 놀이터에서도 아이와 잘 놀아주는 프랑스 부모 또는 베이비시터보다는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또는 혼자 놀고 있고, 어른들은 각자 혼자 있거나, 지인과 대화하고 있다. 나는 이 풍경을 조금 다른 시각으로 본다. 이는 어른과 아이가 각자의 세상을 인정하며 자기 세계를 사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편하고자 아이를 방치한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종종 있었다. 민족성, 가치관, 문화의 차이일 수는 있겠지만, 아이가 만 6세 이하라면 부모가 최대한 아이와 함께 교감하고 시간을 같이 보내는 것이 더 옳다고 생각한다. 


이곳에서는 아이가 울고 있을 때, 아이에게 바로 달려가지 않는다. 놀이터에서 어린이집에서 길거리에서 울고 있는 아이를 보고, 어른들은 달래주기보다는 울게 내버려 두는 것을 종종 목격했다.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음으로써 아이들 스스로 자신의 감정 상태를 들여다 보고, 스스로 울음을 그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어린아이가 울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이한테 다가가지 않으면 아이는 심한 좌절감을 맛본다. 자칫 부모에 대한 신뢰를 잃을 수도 있다. 초등학교도 아직 들어가지 않은 아이가 혼자 저 멀리서 구슬프게 울고 있는데 알면서도 다가가지 않고, 기다림의 훈련이라는 말로 아이 감정을 보살펴주지 않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수면 교육이라고 해서, 만 1살 밖에 안된 아이를 따로 재운다. 울며 보채는데도, 무섭다고 엄마 아빠를 소리소리 질러도 끝까지 따로 재우려는 것은 부모가 편하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


<프랑스 아이처럼>이란 책이 무조건 틀렸다는 것은 아니다. 공감되는 부분도 꽤 있다. 다만, 책에 나온 프랑스 육아법이 다 옳은 것은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다. 신생아부터 만 9~10살까지는 부모와 자녀의 애착 관계 형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이 기질을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프랑스 육아법을 무작정 따라 하다 보면 역효과만 날 수 있다. 예민한 아이라서 부모의 무조건적이 관심, 보살핌, 사랑이 필요한데 울고 있는데도 옆에 다가가서 달래주지 않으면 안 된다. 훈련 또는 훈육이란 미명 하에 엄격하게 아이를 다루고, 아이가 밤에 혼자 자는 것이 무서워서 소리를 지르는데도 수면 교육시키겠다고 따로 떨어져 잔다면 아이는 더욱 예민해질 수밖에 없다.  


<프랑스 아이처럼>이란 책 때문에 프랑스 아이, 프랑스 부모, 프랑스 육아법에 대한 환상이 있지 않나 싶다. 2013년에 출간됐으니, 10여 년 전 이야기다. 10년이면 강산도 바뀐다는 말이 있다. 그 사이 프랑스 사회도 변했다. 비록 변화에 느린 프랑스라고 하지만 분명 변화가 있고 세대 차이도 있다. 이곳에도 소황제들이 있다. 아이 요구를 무조건적으로 다 들어주고, 아이를 왕처럼 떠받들기도 한다. 유치원 담임 선생님과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요즘 엄마들도 많이 변했다고 하셨다. 유치원 교사의 권위도 많이 떨어졌다고 한탄을 하셨다. 그렇다. 세상 사는 게 다 똑같다. 프랑스라고 아이 키우는 데 있어 대단할 것 없다. 여기도 문제아가 있고, 문제 부모도 있다. 그렇니 지구 반대편에는 육아 천국, 교육 천국이 있을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지금 내 옆에 있는 아이를 한번 더 바라보고, 눈을 마주치고, 아이의 소리에 귀담아듣고, 더 관심을 기울이자. 내 아이 기질에 맞게 육아하고 교육하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한다. 내가 처한 상황에 맞게, 내 아이를 가장 중심에 두고, 아이 마음을 가장 잘 살핀다면 그것이 최고의 육아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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