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후, 프랑스몽...
루이뷔통 재단에서는 4월 3일까지 모로조프 전을 한다. 원래 2월에 종료인데, 인기에 힘입어 연장됐다. 최근 전시장의 변화는 우크라이나 러시아 전쟁과 관련된 사안이다. 전시된 작품 모두 러시아에서 왔기 때문에 러시아에 대한 반감 때문인지 몰라도 잠깐 사람들이 주춤했었다. 원래 평일에도 사람들이 많은데, 어떤 날은 평일에 사람이 없고 한산하길래 러시아 리스크가 있나 보다 여겼다. 그래서인지 미술관에서도 금요일 저녁은 무료 출입이 가능하며, 오픈 전 1시간 동안 멤버십 회원들만 입장 가능한 파격적인 새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VIP 만을 위한 전시라고 볼 수 있는데, 사람들에게 치이지 않고 편안하고 쾌적하게 볼 수 있다. 전시가 끝나기 전에 나도 한번 이용해 보고 싶긴 하다. 전쟁이 길어지자 전쟁 초반과는 달리 다시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물도 모두 압수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전원 가방에서 생수병을 꺼내 관계자에게 제출했다. 이 와중에 약간의 실랑이도 있었다. 전쟁으로 인해 테러 위험에 대비한다는 취지였다. 그 말은 맞다. 얼마 전 에펠탑 폭파 가짜 영상이 돌기도 했다. 이렇게 될 수도 있다는 경고성 영상이었는데, 충격적이었다. 음료를 관리하는 직원들도 힘들어 보였다. 우리는 물병 총 4개를 순순히 제출했다. 이곳을 나갈 때 다시 받았다.
3월 19일 토요일 오후 2시 반, 우진이와 같은 반 친구 V네와 함께 미술관 아뜰리에를 찾았다. V엄마 C는 이전에 이곳에 자주 왔었는데, 지금은 V와 그 밑에 쌍둥이 여동생 R과 F를 키우느라 자주 못 온다고 했다. 그녀는 키가 크고 미인이다. 등굣길에 자주 마주치며 인사하고, 생일 초대를 받으면서 더욱 가까워졌다. 영어가 유창한 그녀는 알고 보니 미술 관련 일을 결혼 전에 했었다. 그때 한국을 포함한 다른 여러 나라에 미술품을 보내고, 갤러리 작품 전시하는 일을 했다.
그녀와 약 3시간 반 동안 함께 있으면서 느낀 점은 '엄마는 위대하다'였다. 이날 3명 아이를 혼자 케어하는데, 단 한 번도 짜증 내거나 인상 찌푸리거나 긴장하는 모습이 없었다. 사실 그 전에도 그녀를 보고 있으면 어떻게 아이 3명을 저렇게 평온한 얼굴로 대하고, 케어할 수 있지? 아이들이 동시에 소리치며 울고 불고 하는데도 그녀는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서두르는 법이 없었다. 우아한 자태를 잃지 않았다. 한 아이가 넘어져서 울고, 다른 아이가 엄마 찾느라 울고, 또 다른 아이가 유모차에 내리고 싶다고 울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한숨 한번 짓지 않고, 차분하게 아이들을 다뤘다. 나라면 이미 녹초가 됐을 것 같다.
프랑스에 살면서 이런 프랑스 엄마는 처음이다. 며칠 전 쓴 프랑스 아이처럼 팩트체크가 무색하리 만큼 이렇게 인상 쓰지 않고, 소리치지 않는 프랑스 엄마가 있다고?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녀에게 물었다. 프랑스에서는 화내고, 아이에게 엄격하게 대하며, 소리를 지르는 부모들을 자주 봤는데, 당신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고 하니, 그녀는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전에 나도 그렇게 했는데, 화내 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그 후로 명상을 해요. 울고 떼쓰면 내 안에서 명상을 합니다." 멋진 말이다. 엄마는 대단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낀다. 5살, 3살, 3살 이 조합으로 엄마 혼자 데리고 다니면서, 유모차에 각종 아이 물건까지... 모든 것을 처리하는 그녀가 대단해 보였다. 내가 곁에서 도와주려고 해도 아이들은 엄마만 찾았다.
우리는 미술관에서 모네, 반 고흐, 고갱의 그림을 감상하며, 큐레이터의 설명을 들은 뒤, 찰흙 만들기 아뜰리에 시간을 가졌다. 에꼴 뒤 루브르 학생 3명이 아뜰리에에 참가해서 큐레이터 설명을 듣고, 필기를 하고, 찰흙 시간도 함께 했다. 그중 한 명이 중국 학생이었는데 서로 반가워했다. 아시아인을 만난 반가움이란... 그녀는 중국 동쪽에 있는 소주 출신이었다. 학창 시절 여행을 많이 다녔는데, 항주와 소주를 배 타고 여행했던 기억이 났다. 어떻게 배에서 잠을 자며 도시를 넘나들었을까... 지금 생각해보니 까마득하기도 하고, 지금 저질 체력인 내가 그때는 잘도 쏘다니고 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한국인 및 중국인 친구들과 함께 무리지어 이곳 저곳 여행을 다녔다. 북경, 상해, 청도, 대동, 내몽고, 우한, 남경, 항주, 소주, 서안 등 중국 동서남북을 다녔다.
20대 때가 주마등같이 지나갔다. 젊음이 좋긴 좋나 보다. 그때 그렇게 빨빨거리고 돌아다녀도 아픈 곳 없이 지치지 않고 다양한 경험을 했다. 어렴풋이 중국 생활이 기억나면서 중국 학생과 오랜만에 중국어로 대화를 했다. 그녀는 내게 다 알아듣겠다며 중국어 칭찬을 했다. 나는 속으로 아이 키우면서 근 5년 동안 한 번도 사용하지 않던 중국어가 갑자기 생각지도 못하게 튀어나오는 걸 보고, '모니카 아직 살아있구나. 옛날에 공부한 게 완전히 사라지진 않나 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동안 그때 그 시절 중국몽에 빠져있는데, 아이가 옆에서 내 옷을 잡아끌면서 엄마 하는 소리에 달콤한 꿈에서 얼른 깨어났다.
사람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 내가 그 장소에 있는가에 따라 그 장소에 대한 생각과 이미지가 달라지는 것 같다. 파리에 만 1세 된 아이를 데리고 왔다. 말도 못 해서 생활에 어려움도 많았고, 하루하루 육아로 허덕였고, 한국 음식 만들어 먹는 게 힘들었고, 인종차별을 당하기도 했다. 물론 좋은 경험도 많이 하고, 좋은 곳으로 여행도 많이 다녔지만 언제 어디든 가뿐하게 떠날 수 있는 자유의 몸이 아닌, 내 가족, 내 아이를 돌봐야 한다는 책임감이 늘 무거웠다. 물론 신랑만큼의 책임감은 아니겠지만...
나는 중국을 떠올리면 자유로웠던 시절로 기억에 남는다. 이런 걸 벨 에포크라 하는 걸까? 중국 어학연수 및 교환학생 시절, 기숙사 등 주변 환경이 열악했지만 그래도 뭐든 즐겁고 재밌었다. 열악한 환경도 젊음이란 단어 하나로 모든 게 해결됐다. 그때는 몰랐는데 시간이 지나고 되돌아보니 '젊음'은 많은 것을 담고 있는 단어 같다. 처음 보는 풍경, 물건, 음식 등 모든 것이 신기했다. 40도씨까지 올라간 무더운 여름에도 친구들과 재밌다며 여기저기 잘도 돌아다녔다. 징그러운 못 먹을 것 같은 음식도 신기하다며 깔깔 대며 먹어봤다. 세상 처음 보는 물건에도 신기해했다. 중국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도 재미있었고, 모든 것이 새롭고 놀라웠다.
지금의 놀라움과 그때의 놀라움은 차원이 다른 것 같다. 지금 그렇게 하라면 못할 것 같다. 그때의 내가 참 낯설다. 젊은 시절에는 체력도 좋고, 에너지 넘치고, 밝고 생기 있고, 말도 많고, 모험심 많고, 도전적이고, 열정적이며 적극적이었다. 그랬던 내가 결혼하고 해외에서 아이를 키우면서 체력도 안 좋고, 에너지도 없고, 생기도 없고, 말도 없고, 열정도 없고, 소심하고, 소극적으로 변했다. 한 마디로 너무 큰 변화다. 내 모습이 맞나 싶고, 지금의 나를 보고 있으면 어떻게 이토록 변했을까 싶기도 하다. 결혼, 출산, 육아, 엄마라는 단어가 이렇게 사람을 변화시킬 수가 있나...
아뜰리에가 끝나고, 우리 6명은 바로 옆에 있는 아끌리마따시옹 공원에 가서 간식을 먹었다. 마들렌, 브리오슈, 꽁포트, 사탕 등을 먹었다. 아이들은 약 30분 정도 공원에서 뛰어 놀았다. 집이 멀지 않았지만 집까지 가는 내내 아이들은 장난치고, 울고, 떼쓰고... 혼자라면 10분이면 갈 거리를 30분 이상이 걸렸다. 쌍둥이들이 다투니 그녀는 한 손에는 아이를 안고, 다른 한 손에는 아이를 태운 유모차를 끌었다.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보니 눈가에 주름이 많이 보였다. 그녀도 나와 같을까? 결혼 전에는 미술업계에서 일하면서 글로벌하게 활동하며, 활기 넘치는 여성이었다. 애 셋 엄마가 되고 나서 미술관도 자주 못 다니며 주말에는 아이 세 명 돌보는 삶으로 바뀐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까? 물론 평일에는 베이비시터도 있고, 자신의 일도 하고 있긴 하다. 방학 때마다 양가 도움도 받아가면서...
학창 시절도 그때는 힘들다고 생각한 적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지나고 보니 다 좋은 추억으로 남았다. 좋았던 일만 생각난다. 열악한 환경조차도 재미있는 기억으로 남아있다. 힘겨웠던 시간도 다 아름다운 추억이 됐다. 지금 이 시간도 지나서 돌이켜보면 좋았던 기억만 남을까? 그럴 것 같다. 특히 이곳에서 아이와 함께 한 시간이 많이 그리울 것 같다.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천천히 둘러본다. 아이들은 고무 찰흙을 가지고 열심히 만들기를 하고 있다. 큰 유리 창문 너머로 바닥에 물이 흐른다.
남자 큐레이터가 나보고 갑자기 '안녕하세요'라는 한국말을 하며, 10년 전 한국으로 여행을 갔는데 한국 음식이 맛있었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그도 한국인인 나를 보고 10년 전 한국으로 여행 갔던 순간을 잠시 떠올렸다. 나는 중국 학생으로 인해 10년도 훨씬 더 된 중국을 떠올리듯, 그는 나를 보고 한국을 떠올렸다. 처음 만난 우리 셋은 그렇게 서로를 통해 자신의 과거를 떠올렸다. 지금 이 순간, 이 장소, 이 냄새, 이 풍경, 이 사람들 모두 하나하나 내 눈, 코, 귀, 머리, 가슴에 오롯이 담아본다.
10년 후, 다른 어딘가에 살게 되어 프랑스인을 만난다면, 그때 나는 또 10년 전 프랑스를 떠올리며 '프랑스몽에 잠시 빠져 그때를 벨 에포크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