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장난
아이와 같은 반 친구 E의 엄마이자, 같은 아파트 옆 동에 사는 그녀 F.
그녀를 처음 본 그날을 잊을 수 없다. 그 당시 E는 늘 아빠 하고만 다녔다. 아침 등굣길이며 아이를 데리러 갈 때에도 주말에 공원에 같이 놀러 갈 때도 늘 아빠 하고만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F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2020년 11월, 검은색 롱 파카로 온 몸을 다 쌌다. 옷을 입었다는 표현보다 옷으로 몸을 싸맸다는 표현이 어울릴 지경이었다. 검은색 캡 모자로 얼굴을 푹 가렸다. 그녀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안녕하세요"라고 내게 인사했다. 키가 매우 크고 말랐다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인사도 나누고, 연락처도 주고받았다. F와 함께 주말에 볼로뉴 숲에서 같이 놀기로 했는데 아빠만 나왔다. 나는 당연히 엄마가 나올 줄 알았다. 어느 날은 F에게 아이들과 함께 뮤지엄에 같이 가자고 했는데, 당일날 '남편이 나갈 거예요'라는 답장이 와서 당황스러운 적도 있었다. 뮤지엄에서 그 집 아빠, 딸, 나, 내 아이 이렇게 4명이 같이 다닌 적도 있다. 누가 보면 참 이상한 가족이다 생각할 수도 있겠다. 프랑스, 프랑스 모로코 혼혈, 한국인 이런 조합으로 다녔으니... 그래도 프랑스, 특히 파리는 다민족, 다인종 도시에다 타인의 사생활에 크게 관심을 갖지 않기 때문에 불편한 시선은 전혀 없었다.
2021년 새해가 왔고, 봄기운이 느껴지자 그녀는 점점 옷이 가벼워졌다. 조개 속에 꽁꽁 감춰있던 영롱한 진주가 나오듯, 검은 패딩과 모자로 그동안 가리고만 다녔던 그녀의 몸과 얼굴을 드디어 볼 수 있었다. 그녀는 까만 진주였다. 모델과 디자이너를 병행했었는데 지금은 잠시 쉬고 있다고 했다. 그녀가 직접 만든 화려한 드레스를 직접 입은 사진을 보았는데, 비현실적으로 이뻤다. 그녀의 눈동자는 에메랄드 색깔이다. 누가 봐도 미인이라고 할 수 있는 그녀는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모로코인이었다. 그동안 몸을 가리고 다녔던 이유는 2020년 9월 유방암에 걸렸었다고 했다. 다행히 초기라서 완치됐지만, 면역력이 약해져서 코로나 19에 감염될까 봐 몸을 사리고 다녔다고 했다. 그제야 그녀의 두문분출과 검은색 롱 패딩으로 꽁꽁 싸매고 다닌 이유를 알게 됐다.
그녀는 이제 몸이 괜찮다며, 자신감을 회복한 듯 보였다. 여름이 점점 다가오자 탄탄한 몸을 과시하기도 했고, 술도 가끔 하면서 파리의 여름을 즐기는 듯 보였다. 풀밭에 돗자리를 펴고 아이들과 함께 피크닉을 즐기기도 했다. 평소 그녀는 친정 엄마와 자주 통화를 했다. 아이들과 함께 놀고 있을 때도 아랍어로 화상 통화를 하며 무슨 말인지는 못 알아듣지만, 마치 시시콜콜한 것까지 모녀가 공유하는 듯 서로 깔깔대는 모습이 한편으로 부러워 보였다.
프랑스에는 방학이 6주마다 한 번씩 돌아오는데, 방학만 되면 그녀의 가족은 모로코에 갔다. 비행기로 약 3시간 정도면 도착하는 그녀 고국 모로코(Maroc). 그녀의 고향은 모로코에서 4번째로 큰 도시인 마라케시(Marrakech)다. 고향에 대한 자부심이 큰 그녀는 모로코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사진을 보여주며 고국 자랑에 끊임없이 이야기를 했다. 모로코에 방학마다 가는 이유를 물으니, 가족과 친구들도 거기에 많이 있고, 날씨도 좋고, 자기는 모로코가 너무 좋다는 것이다. 지난여름, 모로코에서 구매한 모로코 전통 의상을 나와 아이에게 선물로 준 적이 있다. 모로코는 꼭 한번 여행을 해봐야 하는 나라라며 자신은 방학 때마다 고향에 가니, 같이 가자고 말하기도 했다.
그녀는 또 모로코에 가면 마사지와 스파를 원 없이 즐긴다고 했다.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피부를 구릿빛으로 만드는 것도 좋아한다고 했다. 낙천적인 성격의 그녀와 어울리는 국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로코는 아랍어를 사용하는데, 자신의 딸에게 모로코어를 가르쳐주기도 하고, 모로코 전통과 가치관을 심어주려는 노력도 빼먹지 않는 그녀였다.
2021년 11월 26일부터 프랑스에서 모로코로 가는 비행 편이 모두 중단됐다. 그 당시 아프리카 지역에서 새로운 변이 바이러스, 오미크론이 발견됐고, 아프리카 대륙 북단인 모로코는 국경을 폐쇄하기로 결정했다. 프랑스에는 모로코와 알제리 출신 이민자들이 많다. 프랑스에 있는 수많은 아프리카 대륙 이민자들은 프랑스 최대 명절 크리스마스에 고국에도 가지 못하고, 남겨졌다. 크리스마스 때마다 그녀는 고향에 있는 가족들을 위한 각종 선물을 사들고 매년 연말을 친정 식구들과 보냈다. 하지만 식을 줄 모르는 각종 바이러스로 인해 그녀는 2021년 겨울을 프랑스에서 보내게 됐다.
2021년 12월 초, 여느 때와 다름없이 4시 20분에 아이를 데리러 갔고, 늘 그랬듯이 유치원 근처에서 프랑스 아이들이 오후 4시만 되면 먹는 구떼(Gouter, 간식 시간)를 함께 가졌다. 그녀는 누가 봐도 울어서 눈이 퉁퉁 부은 상태였다. 무슨 일이냐고 나는 물었고, 그녀는 친정 엄마가 엊그제 병원에서 췌장암 진단을 받으셨다고 얘기했다. 그런데 곧 다가오는 크리스마스에 엄마를 보러 갈 수 없게 됐다며 낙심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괜찮아지실 거라는 말과 기도할게라는 말 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 한국에 계신 부모님이 떠올랐다. 만약 우리 부모님이 갑자기 큰 병이 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나는 어떻게 하지? 한국에 갈 수 있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평소에 스스로 건강 관리를 열심히 하시는 두 분께 감사한 마음도 들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왔고, 역시나 하늘길은 막혀 있었다. 그녀가 파리를 싫어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날씨였다. 모로코는 겨울에도 따뜻한데, 이곳 파리는 회색빛 겨울 하늘에 비까지 자주 내려서 으슬으슬하고 우중충한 파리의 겨울이 싫다는 그녀였다. 어머니의 안부를 자주 물어보는 것은 실례가 될 것 같아서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 후로, 우리는 구떼 타임도 자연스레 가지지 않았고, 그녀는 조용히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바로 갔다.
1월 중순, 그녀의 왓츠앱 프로필 사진이 갑자기 바뀌었다. 그것도 검은색으로... 프로필 사진은 늘 밝게 웃으며 멋진 포즈를 하고 있는 그녀였는데, 무슨 일인지 궁금했다. 검은색 바탕에 내가 알 수 없는 아랍어가 적혀 있었다. 그녀에게 직접적으로 물어보긴 그래서 알제리 출신 지인에게 물어봤다. '편안한 곳으로 가셨기를...' 이란 뜻이라고 했다. 아뿔싸. 그녀의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것 같았다. 물론 아닐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지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런데 의아한 점은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면, 분명히 고국에 장례를 치르러 갔을 텐데, 학교 앞에서 늘 만나는 그녀였기에 돌아가신 분이 어머니가 아닐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하늘길이 막혀있다 하더라도, 부모가 돌아가셨다면 예외 상황이 적용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전에 그녀가 내게 했던 말이 기억났다. '유자를 술에 타서 먹으면 정말 맛있어. 가끔 유자 칵테일을 만들어 먹는데 정말 좋아해.' 나는 한인 마트에 가서 한국 유자차 한 통을 샀다. 프랑스는 유자를 뜨거운 물에 타서 차로 먹는 문화가 없다. 유자차의 향긋함과 차의 따뜻함이 몸에 들어가면 그녀가 한결 기분이 좋아지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치원 앞에서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그녀.
"F, 잘 지냈어?"
네가 유자 좋아한다고 예전에 말했던 거 기억나서, 엊그제 한인 마트 간 김에 유자차 한 통 샀어. 뜨거운 물에 타서 차처럼 마시면 돼.
"응. 고마워."
사람의 눈동자에 초점이 없다는 말이 이를 두고 한 표현 같다. 그녀는 초점을 잃은 눈동자였다. 보기 드문 심연 같은 에메랄드 색깔을 가진 그녀의 눈동자는 볼 때마다 어떻게 사람이 이런 오묘한 색깔의 눈동자를 가질 수 있을까라고 늘 생각했던 나였다. 그런 그녀의 매력적인 눈동자가 오늘따라 갈 곳을 잃어 헤매고 있었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나는 다시 한번 더 "잘 지내지?"라고 천천히 물었다.
"일주일 전에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어."
"아... 장례식에는 갈 수 없는 거니?"
"응."
나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아니, 부모님이 돌아가셨는데도? 이건 특별한 상황이잖아. 그럼, 예외로 인정해줘야 하는 것 아냐?"
"프랑스는 그런 것 없어."
평소에도 프랑스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가족이었는데 이런 어이없는 상황으로 인해 그녀의 가족은 더욱 프랑스에 정이 떨어졌을 것 같았다.
나는 화가 났다. 동시에 내가 만약 이런 상황이라면 한국은 이런 상황을 어떻게 처리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매일같이 아이를 데리러 오며, 나와 마주치면 애써 웃으며 인사하던 그녀였다. 얼마나 힘들까. 친정 엄마와 참으로 다정해 보였기에 더욱 안타까웠다. 6주마다 모로코에 있는 가족에게 가던 그녀였는데, 정작 어머니께서 갑작스레 돌아가셨을 때는 가족 품으로, 어머니 곁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렇고 있는 것인가? 이런 아이러니한 상황이 세상에 또 어디 있단 말인가.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그녀는 유자차가 맛있다며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그러면서 예전에 친정 엄마가 유자를 비스킷에 발라서 줬는데 너무 맛있었다고 했다. 아마도 유자차를 마시면서 어머니가 더욱 그리웠을 것 같다.
2월 1일, 모로코 정부는 2월 7일부터 항공을 점차적으로 재개하겠다고 발표를 했다. 그녀는 드디어 고국에 갈 수 있게 됐다. 아마도 지금쯤 항공편을 예약하고, 갈 준비로 바쁠 것 같다. 비록 어머니께서 돌아가시는 순간에는 함께 곁에 있지 못했지만, 지금이라도 가족 곁으로, 어머니 곁으로 가서 속으로만 꾹꾹 눌러 삼켰던 그 커다란 슬픔을 충분히 하염없이 모두 다 쏟아내고 오길 바란다. 그래서 그녀 마음이 한결 편안해져서 다시 프랑스로 돌아오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