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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니카 Sep 22. 2020

프랑스에서도 통하는 지성이면 감천이라

드디어 크레쉬 입성!

9월은 프랑스에서는 시작의 달이다. 마치 우리나라의 3월과 같다. 한국은 3월에 입학식 및 온갖 시작을 알리는 행사가 많듯이 프랑스는 9월에 각종 시무식 등 환영 행사가 많다. 여름에 집을 구하고 나서 짐을 하나둘씩 챙기는데 어느 날 엘리베이터에 공지 하나가 붙었다. 구글 번역기를 돌려보았더니 아파트에서 개최하는 친목 도모회였다. 9월이라 여기저기 행사가 많다더니 내가 살게 될 아파트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는 이웃 얼굴이나 익힐 겸 참석하였다. 목요일 저녁 7시 반쯤 아파트 로비에서 케이터링 서비스로 한 손에 핑거 푸드, 다른 한 손에 와인 또는 샴페인을 한잔씩 하면서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나는 우진이랑 어색하게 이리저리 다니면서 쭈뼛쭈뼛했다. 이때 어느 노 부부가 내게 다가와서 먼저 말을 건네었다. 이 분들 없었으면 나는 정말 낙동강 오리알 신세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아랫집에 이사 온 사람이에요?” 휴… 다행히 영어다.

“네, 이번에 이사 왔어요. 4층에 사세요?”

알고 보니 우리 집 바로 위층에 사시는 할아버지 할머니셨다. 70대 후반 정도의 연세로 보이시는데 영어가 유창한 것을 보고 프랑스 분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었는데 이런저런 대화를 통해 젊은 시절에 영국과 미국에 거주한 경험이 있다고 말씀해주셨다. 연락처를 건네주시면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편하게 연락하라고 하셨다. 파리에 와서 처음 받아본 호의에 눈물이 핑 돌 정도였다. 


나도 이 그룹에 함께한다는 소속감을 조금 가지게 되었다. 그렇게 또 우진이와 단둘이 배회하고 있으니 어떤 중년 여성이 내게 다가온다. 프랑수와즈라는 이름의 그녀는 내게 어디서 왔냐고 묻는다. 나는 한국인이며 아직 프랑스어를 잘 못한다고 하니, 아이는 몇 살이냐고 묻는다. 아직 16개월 정도라고 하니, 크레쉬 안 다니냐고 대뜸 묻는다. 그냥 저랑 집에 있다고 대답하니, 얼른 크레쉬를 보내라고 한다. 

그때부터 그녀의 크레쉬 찬양론이 시작되는데 크레쉬는 프랑스가 처음 시도한 아주 자랑스러운 교육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성공적으로 발전해서 독일과 같은 주변 유럽 국가들이 벤치마킹하였다고 당당하게 힘줘 말한다. 20분간 프랑스 크레쉬 찬양 연설이 지속되었는데 나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우진이가 없어질까 봐 두 눈과 귀가 동시에 너무 바빴다. 그녀는 크레쉬의 원조는 프랑스이며 국가가 아이를 안전하게 맡아주기 때문에 우리 프랑스 여성들은 안심하고 일터로 나갈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대부분의 프랑스 여성들은 일을 한다고 하였다. 그만큼 출산과 육아가 한 여성의 인생 큰 틀을 바꿀 만한 것이 아니라는 얘기였다. 아이는 아이고 나는 나다. 임신을 해서 아기가 태어나도 나는 내가 하던 일을 계속하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계속하며 내가 먹던 내가 즐기던 내가 좋아하던 것을 아이가 생겼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바뀌지는 않는다고 했다. 크레쉬는 물론이거니와 프랑스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나로서는 그녀가 단순히 애국심이 한껏 고취된 여성이라고만 생각했다. 


마주치는 이웃들마다 우진이를 보면서 크레쉬 안 다니냐고 물어보길래 나는 크레쉬라는 곳에 대해 한번 알아보기로 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우리 집 바로 옆에 크레쉬가 있었다. 관심이 없을 때는 무심코 지나쳤던 그곳이 바로 크레쉬였다. 아침에 바게트를 사러 갈 때마다 엄마 또는 아빠 손을 잡고 아장아장 걸어오는 아이들을 보고 이 주변에 뭐가 있나 보다 생각을 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사립 크레쉬가 있었던 것이다. 나는 용기 내어 벨을 살짝 눌렀다. 한 여성이 문 밖으로 나왔고 나는 입학 관련하여 문의를 하였다. 250만 원을 지불하면서까지 그리 절박하지는 않았다. 집 바로 옆이라 너무 좋은 조건이었지만 가서 무엇을 배우는 것도 아니고 그저 아이를 안전하게 맡기는 금액치 고는 비싸서 마음을 바로 접었다.

아이를 키우며 힘들 때마다 창문 너머로 안까지 훤히 보이는 크레쉬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 안에서 놀고 있는 우진이 또래 아이들을 볼 때마다 지금 당장이라도 우진이를 저기 데려다 놓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루하루를 견딘다는 표현을 쓸 정도로 힘든 육아의 나날들은 그렇게 지속되었다.




신랑의 회사 창립일인 어느 날,  우리 부부는 우리 동네인 Avenue Mozart를 거닐다가 문득 로댕이라는 크레쉬 앞에 발걸음이 멈췄고 신랑은 지체 없이 벨을 눌렀다. 소심한 나와는 달리 어떤 일에든 대범한 신랑은 크레쉬에 들어가서 자리 있는지 직접 물어보자고 했다. 크레쉬 안에는 아이들이 북적북적거렸고, 원장이라는 젊은 여성이 우리를 안내해주었다. 혼자였으면 어림도 없었을 일을, 남편이 대동하니 일이 수월하게 풀리는 것 같았다. 마담 보엘이라는 여성의 이메일 주소를 알려주었다. 이 분께 연락해보면 해결이 어느 정도 될 것이라는 말을 해주었다. 

‘이 사람이 대체 누구길래?’


마담 보엘은 16구 시청의 부시장급으로서 보육 관련하여 전반적으로 관장하는 최고 결정권자였다. 이 분께 메일도 쓰고, 사정을 하면 내 부탁을 들어 줄지도 모른다는 한 줄기 희망이 생겼다. 신랑의 주특기를 업무 외 발휘할 때가 드디어 왔다. 바로 기획력! 마담 보엘이라는 상사 앞에서 마치 발표라도 하는 듯이 신랑은 PPT를 멋지게 만들었다. 첫 페이지에는 내 소개로 나는 어떤 나라에서 살다 왔는지를  국기로 한눈에 보기 쉽게 표현했다. 그의 말에 따르자면, 하루에도 비슷한 문의가 수백 통에 이르는 높은 분들께는 무조건 간단명료하게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단다. 그래서 내 소개도 글로 주저리 하기보다는 국기로 표현했다. 한국, 중국, 홍콩의 국기.. 그다음 장에는 내 아이가 왜 크레쉬에 다녀야 하는지를 번호를 매겨 작성했다. 


첫째, 나의 힘든 점을 언급했다. 정말 아파 죽을 지경까지 왔을 때, 당장 아기를 맡길 곳이 없어서 응급실도 못 가고 거실에 데굴데굴 굴었다. 

둘째, 아이의 사회성 발달을 위해 필요하다. 동양 아이라고 놀이터에서 잘 끼워주지 않고, 아이가 엄마랑만 지내서 사회성이 떨어지고 있다고 언급했다. 

셋째, 나는 프랑스어를 전혀 못해서 간단한 마트 장보기 조차도 못하고 있다. 생활이 안되고 있다. 아기를 키우는 동안은 프랑스어 공부할 시간이 전혀 없다. (프랑스는 자국 언어에 대한 자부심이 커서 외국인이 프랑스어를 배우겠다고 하면 두 손 두 팔 벌려 좋아한다. 그래서 시청에서 무료 프랑스어 강의를 제공하고 있다.) 

넷째, 가장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해야 할 차례다. 프랑스 육아법이 한국에서는 많이 화제가 되고 있고, 그만큼 한국에서는 프랑스의 뛰어난 육아 시스템을 배우려고 하고 있다. 실제 ‘프랑스 아이처럼’이란 책이 베스트셀러를 넘어 스테디셀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프랑스인들을 기분 좋게 해주는 작전이 필요했다. 너희 선진 교육을 높이 평가하니 우리도 좀 배워가고 싶다는 어필을 강하게 했다. 상대를 무조건 칭찬하고 비행기 태우기 전략이다. 




그 결과는 대성공이다. 일주일 정도 지난 어느 날, 마담 보엘에게서 답변이 왔다. 몇 날 며칠에 시청으로 오라는 것이다. 야호! 내 PPT에 감동을 받은 것일까? 당장 오케이 답변 메일을 보내고 그날을 위해 준비를 많이 했다. 


“왜 크레쉬에 보내려고 하죠?” 그녀는 영어로 내게 물었다.

나는 PPT 내용의 있는 그대로 간단명료하게 답했다. 그런 뒤, 끝으로 프랑스의 우수한 육아법 및 영유아 교육 시스템을 한국은 높이 평가하며, 그래서 한국인으로서 프랑스 육아법을 배우고 싶어 한다고 말했더니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면서 시종일관 딱딱하게 굳어있던 얼굴에 그제야 미소가 사르르 번진다. 그 미소에서 나는 한줄기 희망을 보았다. 종이에다 뭘 적더니 내게 쪽지 한 장을 건네준다. 이곳으로 지금 바로 전화를 하란다. 감사 인사를 하고 마담 보엘과는 헤어졌다. 돌아서는 뒷모습에서 마담 보엘이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면서 떨리면서도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문을 닫고 나왔다. 시청 앞에서 쪽지에 적힌 전화번호로 곧장 전화를 했다. 우리 집과는 그리 멀지 않은 크레쉬였다. 오며 가며 한 번씩 봤던 그곳은 해리포터에나 나올 법한  마법학교 같은 외관을 가졌다. 중세 시대 건물 같기도 한 그곳을 지나칠 때면 이곳에는 어떤 아이들이 다닐까 궁금해하기도 했었고, 한 번은 그냥 벨을 눌러 문의하러 왔다고 했던 적도 있었다. 물론 문 앞에서 보기 좋게 퇴짜를 맞았지만… 이곳이 우리 아이가 다닐 곳이라니! 보고도 믿기지가 않았다.




크레쉬 원장과 미팅 날짜를 잡았다. 아이와 함께 오라는 말을 하는 것을 보니 아이도 관찰을 할 모양이다. 미팅 날이 다가왔고, 우진이를 단정하게 잘 챙겨 입히고 나도 좋은 옷을 골라서 잘 차려 입고 갔다. 크레쉬 원장인 마담 레이는 꽤나 깐깐한 여성이었다. 나와 면담하는 내내 틈틈이 아이를 관찰하였다. 아이의 건강 상태며 알트 다녔을 때는 어땠는지 등등에 관해 30분 정도 면담을 하는데 “Il est sage.”라고 한다. 이 말을 직역하면 ‘현명하다’는 말인데,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프랑스에서 아이를 칭찬하는 말 중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단다

 마담 레이는 10월 중순부터 오라고 한다. 2주간은 엄마와 함께 적응 기간을 가질 것이며 적응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되면 그 후로는 엄마가 동행하지 않는다고 했다. 

(좌) 크레쉬 입구 앞에서 활짝 웃는 우진이 (우) 크레쉬에서 인형극을 보며 재밌어 하는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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