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국 언어에 자부심이 강한 프랑스인
주재원 패키지 안에는 국제학교가 포함되어 있다. 아이는 만 3살이 되자 파리 15구에 있는 EIB (Ecole International Bilangue)이라는 국제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영어를 해야 하기 때문에 영어책을 몇 권 사려고 동네 서점에 갔다. 영어책이 없단다. 한국에 갈 때마다 크고 작은 서점에 가보면 아이들을 위한 영어책이 없는 곳은 없다. 그런데 파리에는 영어책 찾기가 그리 쉽지는 않았다. 파리에는 생 제르망에 가면 Gibert Jaune라는 대형 서점이 있는데, 한국으로 치면 교보문고 정도로 생각할 수 있다. 이렇게 큰 서점에 가야 영어책을 구매할 수 있다. 한국은 영어 열풍이 확실히 있다. 그래서 어릴 적부터 영어를 배우려고 한다. 하지만 프랑스는 영어보다 자국 언어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며 어린 시절에는 모국어를 더욱 중요시한다. 프랑스어가 20세기에는 글로벌 언어로써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우리 엄마 세대들이 대학생이 당시에는 불문과가 매우 인기 있는 과였다. 국제기구에서도 프랑 어가 국제 언어 중 하나로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시대가 흐를수록 영어의 부상으로 글로벌 언어로서 자리는 내주게 되었지만 여전히 자국민들은 자국어 부심이 크다. 그래서인지 유럽 국가 중에서 영어 사용 능력이 비교적 떨어진다. 프랑스인들 중에서는 영어를 알면서 일부러 안 쓰는 사람도 있고, 실제 잘 모르는 사람도 있다. 더 재미있는 사실은 영어를 못하는 것에 대해 그다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때로는 영어를 할 줄 모르는 것에 대해 아주 당당한 사람도 있다. 행정 업무 등등으로 전화 통화를 할 때, 나는 먼저 "실례지만, 영어 할 줄 아세요?"라고 물으면, 10명 중 7명은 "아니요"라고 당당히 말한다. 때로는 "아니요!!!"라고 단호한 어조로 말하는데, '난 그딴 언어는 몰라. 아니 몰라도 돼!'라고 하듯이 매우 힘주어 크게 말한다.
프랑스에는 Brocante 또는 Braderie라는 소위 중고 물품을 내놓아 파는 벼룩시장이 도시 곳곳에서 자주 열린다. 나는 이곳에 가서 처음으로 영어책을 샀다. 중고품이지만 상태가 괜찮은 것들만 내놓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 곳을 즐겨 찾는다. 게다가 역사와 전통을 중요시하는 프랑스인들은 오래되고 역사가 깊은 물건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내가 보기에는 너무도 오래되어 보여서 누가 사갈까 싶은 그릇도 100년 넘은 그릇이라며 높은 값에 사가는 프랑스인들을 많이 보았다. 나는 이곳 벼룩시장에서 영어책을 5권 정도 구매했다.
프랑스에는 크고 작은 성당이 수없이 많다. 우리 집에서 걸어서 5분밖에 안 걸리는 곳에 주일에 미사가 열리는 L’eglise Assomption de Passy라는 성당 하나가 있다. 그곳에서는 매년 2번 정도 중고품 벼룩시장이 열린다. 그리고 이 성당 안에는 성당 학교가 있다. 만 3세 이상부터 다닐 수 있는 유치원도 있고, 초중등 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도 간혹 보였다. 그리고 작은 도서관이 있었다. 매일 오픈을 하며 낡아 보이는 오래된 책도 아이들은 좋아하며 다닥다닥 붙어있는 조그만 의자에 나란히 앉아서 책을 읽는다. 크기도 작고, 책도 오래되어 보이지만 아이들은 이곳에서 손때 뭍은 책을 즐기고, 심지어 대출 시스템도 있어서 몇 권씩 빌려가서 집에서 읽는다. 한국에는 유아 시절부터 전집을 사서 집안 한 벽을 메우는 집이 많다고 들었다. 하지만 이곳 프랑스는 집에 전집을 사는 일이 드물다. 공공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으면 되고, 필요한 책만 사서 읽는다. 읽지도 않을 책을 미리부터 전집으로 사서 집을 데코레이션 하지는 않는다.
우진이가 크레쉬 다닐 적 단짝 여자 친구인 말리아의 집에 초대되어 갔을 때 우리 집과는 달리 거실은 아이들의 물건이 하나도 없었다. 말리아의 방이라고 보여 주었을 때 비로소 아이의 온갖 핑크빛 장난감이 방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책은 프랑스어 동화책 몇십 권 정도 있었다. 우리 집 이웃 중에 아이 4명을 키우는 집이 있다. 그녀는 우리 가족을 자기 집에 초대를 하였고, 4명의 아이를 키우는 집이라서 분명 집안은 각종 책과 장난감으로 가득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갔다. 그런데 이 집 또한 거실과 복도 곳곳만 보았을 때는 아이 4명을 키우는 집이라고 전혀 상상할 수 없었다. 아이들 4명이 지내는 방 2개를 보여주는데 그제야 이층 침대며 곳곳에 장난감이며 아이 책들이며 아이들이 지내는 집이 맞음을 알 수 있었다. 4명의 아이들이 있음에도 아이방에는 전집은 없었다. 거실에는 소파, 티브이, 벽에 걸린 액자들, 그리고 거실 베란다 밖으로 보이는 에펠탑만 내 눈에 보였지, 그 어디에도 거실 벽면을 채운 아동 전집은 없었다. 이렇게 프랑스는 집안에 아이가 있다고 아이를 위한 공간을 만들지 않고, 부부의 공간도 존중하며, 온 가족이 함께 사용하는 거실이 경우는 온 가족의 공간이지 아이의 전유물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했다.
나는 추운 겨울이 다가오자 어린 우진이를 데리고 멀리 나갈 수가 없어서 이곳 성당 어린이 도서관을 자주 찾아갔다. 사서로 일하시는 호호백발의 연세가 지긋하신 할머니께서는 우리가 올 때면 약간은 근엄하신 표정으로 맞아주셨다. 매우 작은 어린이 도서관이지만 오래된 책 냄새와 꼬깃꼬깃한 손때 뭍은 동화책이 주는 편안함이 있었다. 모두 프랑스어 책이다. 영어책은 단 한 권도 없다. 성당 공터에서 공차기를 하다가 허겁지겁 들어와서는 책을 읽는 아이들, 삼삼오오 모여서 공주님 나오는 책을 같이 보는 7살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 아이들, 그리고 만화책에 푹 빠진 안경 낀 10살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들... 모두 제각각 자신이 읽고 싶은 책을 읽고 있었다. 나는 우진이에게 2살 정도 아이가 읽을 수 있는 글자가 매우 적고, 그림이 풍부한 동화책을 집어다가 읽어주었다. 동물이 내는 소리를 표현한 책인데 곁에서 우리를 관찰하던 아이들이 곁으로 와서 나 대신 우진이에게 네이티브 발음으로 책을 읽어주었다. 사람을 좋아하는 우진이는 대여섯 명 되는 형, 누나들이 자신을 에워싸고 책을 읽어주니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발음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그 멤버들은 성당에 자주 오며, 도서관도 자주 찾았다. 우진이가 좋아하는 형, 누나들을 만나도록 해주기 위해 성당 도서관을 자주 찾아갔다. 우리의 겨울은 그렇게 동네 도서관과 함께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