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평생 입맛을 바꾸기란 정말 어려운 일!
홍콩에서 임신을 해서 홍콩에서 병원을 다녔고, 출산은 한국에서 하고, 몸조리를 하다가 아기가 100일 즈음에 다시 홍콩으로 돌아와서 아기가 첫 돌을 맞이할 때까지 홍콩에서 아기를 키웠다. 아시아 주요 두 나라에서 아기를 낳고 키우면서 느낀 점은 유아 용품 및 식품들이 잘 되어 있다는 점이다. 한국 마트에 가면 이유식을 만들어서 포장까지 완벽히 해 놓은 이유식들이 브랜드별로 예쁘게 진열되어 있다. 심지어 온라인 쇼핑몰에서 팔기도 한다. 아기들 간식은 또 어떤가! 일명 핑거 푸드라고 하는 아기 과자가 브랜드별로 색상별로 맛 별로 각양각색이다. 특히 쌀 뻥을 아기들이 좋아해서 한국에서는 쌀로 된 아기 과자를 많이 구매하였고, 홍콩에서는 주로 거버에서 나오는 아기 과자를 구매했었다.
프랑스에 오니 이런 것들이 없었다. 아기 간식을 사러 마트에 가보았다. 마트에는 2~3개 되는 프랑스 브랜드의 떠먹거나 짜서 먹는 요구르트 밖에 없었다. 거버를 찾으려고 해도 어디에도 없었다. 어떻게 한국에도 홍콩에도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거버 핑거푸드가 없을 수가 있지? 대형 까르푸를 가봐도, 동네 모노프리, 프랑프리를 가봐도 어디에서도 거버에서 나오는 아기 스낵은 찾을 수가 없었다. 유아용 식품이 있긴 한데, 매우 단출했다.
대체 이 나라 아이들은 무엇을 먹나 보았더니, 일반인들이 사 먹는 바게트 또는 크로와상, 빵 오 쇼콜라를 먹고 있는 것이 아닌가. 2, 3살 배기 아이들도 그냥 어른들 먹는 빵을 그대로 같이 먹고 있었다. 더욱 눈에 띄는 것은 길거리에서 과자를 먹는 아이는 거의 없었고, 빵도 아주 가끔 눈에 띄었고 유모차에서든 걸어 다니면서 든 음식을 먹는 아이들이 별로 없었다. 아이들을 조용히 하기 위해 과자나 사탕을 먹이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나의 경우는 3살 즈음에 한창 춥파춥스 막대 사탕을 늘 열개씩 가방 개 넣고 다녔다. 우진이가 울거나 보챌 때 막대 사탕을 입에 쏙 넣어주기만 하면 잠잠해지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보니 아이는 이 사탕을 먹기 위해 일부러 보채거나 떼쓸 때도 있었다. 그럼 엄마가 지체 없이 본인이 원하는 사탕을 주니까. 요즘은 사탕을 다시 안 먹게 되었지만 3살 즈음에 한창 막대 사탕을 주요하게 들고 다녔다. 왜 프랑스 엄마들은 아이들에게 사탕이나 과자를 길거리에서 아이가 아무리 울어도 극약 처방하지 않는 것일까. 이렇게 수월하게 해결되는데…
프랑스 엄마들은 아무 때나 음식을 먹이지 않겠다는 원칙이 있는 듯했다. 물론 젤리나 사탕을 먹이는 엄마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최소한 내 눈에는 젤리나 사탕 또는 초콜릿을 길거리에서 주는 엄마들을 그렇게 많이 보지는 않았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우리 부부, 그리고 한국 음식을 1년 넘게 먹은 아이는 한국 음식이 익숙할 수밖에 없다.
그나마 한국 음식이라도 먹어야 이 낯선 땅에서 살아갈 힘이 날 것 같았다. 나는 프랑스 대형 할인 마트인 까르푸에서 한국 식재료와 최대한 비슷한 식재료들을 구매해서 된장찌개, 김치찌개, 부침개, 미역국, 카레, 짜장밥, 불고기, 제육볶음 등을 만들어 먹었다. 얼큰한 국물 요리가 당기는 날이면, 한인 마트에 파는 갖가지 종류의 라면을 가득 쓸어와서 일주일에 두세 번씩 먹었다. 매콤하고 나트륨 가득한 라면을 먹어줘야 타향살이의 스트레스도 해소되는 듯했다. 마지막에는 달달한 커피 믹스로 마무리를 해주면 아주 완벽했다.
아이에게는 주로 볶음밥을 해주었다. 야채를 쉽사리 먹지 않자, 볶음밥에 양파, 당근, 버섯, 애호박 등 갖가지 야채를 잘게 썰어 넣어 이렇게라도 야채를 섭취할 수 있도록 하였다. 다행히 미역국을 너무 좋아해서 질 좋은 소고기를 사다가, 한인 마트표 미역 또는 한국에서 보내준 미역으로 뜨끈뜨끈한 소고기 미역국을 끓여 먹었다.
비록 프랑스 음식이 입에 썩 맞지는 않지만 여기 있는 동안만이라도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도 경험해봐야 하고, 프랑스 가정식도 많이 먹어보고 싶었다. 그 나라의 음식을 즐긴다는 것은 그 나라 문화를 인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방돔에 위치한 리츠 호텔의 레스 파동(L’espadon)은 미국이 낳은 대문호 헤밍웨이와 친분이 있는 리츠 호텔 소속 레스토랑 지배인이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서 영감을 얻어 식당 이름을 지었다. 이곳은 미슐랭 2 스타 레스토랑으로서 기본 세트 메뉴가 일인당 18만 원 정도 한다. 단품으로 주문하면 이보다 더 비싸기 때문에 점심 특선 메뉴라고 할 수 있는 세트 메뉴를 주문하기로 했다. 프랑스 요리는 한 편의 예술과 같다고 볼 수 있다. 일단 눈이 즐겁다. 순서대로 하나씩 나오기 때문에 먹는 재미도 있다. 한 접시 끝나면 또 한 접시 나오는데 시간이 꽤 걸리며, 그렇게 해서 마지막 디저트까지 다 먹는데 무려 약 3시간이 걸렸다. 한국에서는 단 10분 만에 김밥 한 줄 먹고 식사 끝내고 다시 업무에 돌입하던 때도 있었던 내가 한 끼 식사에 3시간을 쓴다는 것은 시간 낭비이자 먹는 것이 하나의 일처럼 느껴졌다. 대장정의 식사가 끝나고 집으로 오는 내내 피곤했다. 집에 도착해서는 바로 쓰러졌다. 돈은 돈대로 줘가면서 먹는 것이 즐거움이 아닌 피곤한 일이 되어버린 듯했다. 문제는 배가 부른 것 같은데 한국 음식으로 입가심을 해줘야 한 끼 식사가 깔끔하게 정리될 것 같았다.
둘이 합쳐 거의 40만 원짜리의 식사를 하고는 우리 둘은 다시 라면 한 개를 끓여서 반반 나눠 먹었다. 국물까지 시원하게 들이켜고 나서야 우리 부부는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무언의 눈빛을 교환했다.
파리 곳곳에 미슐랭 가이드 식당을 찾아서 프랑스 요리를 먹어보거나, 프랑스 다른 지방 여행 시, 유명 레스토랑을 미리 검색해서 예약을 해서 찾아가 보기도 하였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먹을 때는 맛있어서 먹기보다는 무슨 맛보기 경험 대회라도 출전하듯이 또는 도장깨기 하듯이 프랑스 음식을 먹었다. 그리고는 집 또는 숙소로 돌아와서 컵라면을 뜯었다. 우리 가족은 뼛속까지 한국인이었다.
우진이는 만 3살이 되자 국제학교에 들어갔다. 학비 및 셔틀버스 등 모든 비용은 주재원 패키지로 인해 회사에서 지원해 주는데 단 한 가지 급식비는 지원을 해주지 않았다. 학교 급식을 신청하려면 한 끼에 2만 원 정도 하였다. 만 3살 어린아이가 먹기에는 꽤나 비싼 금액이었다. 나는 수고스럽지만 도시락을 싸기로 했다. 도시락을 싸서 보낼 수 있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나는 자진해서 새벽에 일어나 아이 도시락을 매일 쌌다. 어디 그뿐인가. 2번의 간식도 함께 준비해야만 했다. 주로 메뉴는 볶음밥, 소고기 스테이크, 돈가스, 흰쌀밥, 계란말이, 김밥 등등이었다. 국물 요리는 쏟을까 봐 최대한 자제하고, 대신 아침저녁 메뉴에 국물 요리를 준비했다.
만 4살이 되던 2020년, 주재원 패키지가 끝나고 로컬라이즈 하게 되면서, 우진이는 프랑스어를 못한 채로 국제학교에서 프랑스 공립 유치원으로 전학하게 되었다. 사교적이고 친화력이 빠른 아이인지라 언어 소통이 원활하지 않아도 친구 사귀는 것은 큰 문제가 없었는데, 문제는 바로 3년간 익숙해져 버린 입맛이었다.
9월 1일 입학식 날,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하였다. 9월 첫째 주는 아침마다 집이 전쟁터가 되었다. 학교 가기 싫다고 떼쓰며 문 밖에 절대 발을 내딛지 않았다. 친구들도 좋단다. 선생님도 좋단다. 근데 프랑스 음식은 싫단다. 이를 어쩌면 좋을까. 나는 2주일 정도 각고의 노력을 했다.
"우진아, 엄마도 처음 프랑스에 왔을 때, 치즈는 너무 고약해서 무슨 이런 음식이 있나 하고 안 먹었어. 와인은 한 모금 마시고 쓰다며 안 먹었어. 푸아그라는 또 어떻고? 무슨 이런 비린 맛이 있냐며 뱉었어."
"근데 지금은 어때? 엄마 매일 하루에도 몇 번이고 와인과 치즈를 먹지. 푸아그라는 없어서 못 먹지."
"처음은 힘들어. 두 번 세 번째도 조금 힘들어. 근데 네 번째 되면 한입 정도 먹을 수 있고, 다섯 번째는 먹을 만하다고 느끼기 시작해. 그러다 어느새 프랑스 음식들이 맛있어진단다!"
이런 대화를 거의 2주 동안 했다. 진지하게 말하지 않고, 연극 놀이하듯이 재밌게 놀이처럼 대화했다.
2주가 지난 후, 우진이는 프랑스 음식이 먹을만하다고 말하였다. 한 나라에 적응하여 산다는 것은 그 나라 음식까지 즐길 줄 알아야 진정으로 적응을 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사람이 낳고 자란 땅에서 먹은 끼니가 대체 몇 끼인데, 그 입맛을 한 번에 바꾸기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