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용설명서에 대해
2022년 4월, 서른 중반의 나이로 ADHD 진단을 받았습니다. 사실 이전에도 ADHD를 의심해서 병원에 간 적이 있어요. 그런데 다음 방문을 까먹는 바람에 진단 시기를 5년이나 더 늦추고 말았네요.
아무튼, 이 글은 저 자신을 어떻게든 작동시키려고 쓰는 방법을 모은 '사용설명서'입니다. 하지만 이 사용설명서를 쓰는 이유는 "이 방법이 좋으니 쓰세요"라고 말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저마다 다르거든요. 저만 해도 모두가 좋다고 말하는 방법들을 전혀 실천하지 못한 채 몇십 년을 살았습니다. ADHD가 있음을 알기 전까지는 제 의지가 부족해서, 게을러서 못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제 보니까, 그건 단지 제게 안 맞는 사용설명서였을 뿐이었습니다. 저는 A형 모델인데 전혀 다른 모델의 사용설명서를 보면서 "나는 왜 이 부품이 없지?"라고 의아해하는 것과도 같았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쓰는 방법도 다른 분들에게 잘 안 맞을지 몰라요. 우리는 나이, 환경, 상황이 다르기도 할 테고, 어쩌면 신체적 조건이 다르기도 할 테고, ADHD 외에 갖고 있는 진단명이 다르기도 할 겁니다.
이 사용설명서에 담길 내용이 유용하지 않더라도, 스스로의 사용설명서를 만들자는 것만큼은 자신 있게 권할 수 있으니까요.
저는 ADHD 진단을 받기 전에도 나름의 사용설명서를 만들어 가고 있었지만, ADHD 진단을 받고 나서 드디어 정확한 '나 사용설명서'를 쓸 수 있게 됐습니다. 이른바 '신경다양인'의 스펙트럼에 속한 사람은 세상이 만들어 둔 사용설명서를 따르기가 무척 힘듭니다. '중요한 일을 먼저 해야 한다'든가 '지각을 하지 않으려면 여유시간을 두고 나가야 한다', 또는 '생각하지 말고 바로 시작하라' 같은 유용한 조언들이요. 아, '좋은 습관을 만들기 위해서는 꾸준히 해야 한다'도 있겠네요.
누구나 물건을 잃어버리고, 어딘가에 부딪히고, 힘든 건 미루고, 집중력을 유지하기 어렵고, 때로는 무기력해지고,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고, 건강한 생활패턴을 만들기 어렵고, 일을 시작하거나 마치는 일이 버겁습니다. 누구나 대화를 놓칠 때가 있고, 이상한 말을 할 때가 있고, 부산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누구나 지각을 하고, 방금 들은 말을 까먹습니다. 이런 경험은 누구나 합니다. 그런데 심각도를 따져 본다면 어떨까요. 대부분은 '어쩌다가' 혹은 '가끔'에 머무르지만 ADHD는 '매일', '자주'에서 허우적거립니다. 그래도 힘겹게나마 할 일을 해낸다면 다행이지만, 그러지 못하면 일상과 직업의 영역에서 문제가 생깁니다. 저는 언제나 그런 문제를 겪어 왔기 때문에, 아주 행복한 날에도 마음 어딘가가 살짝 불행하고 불안한 것이 기본 상태였어요.
그런데,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는 곳이 없습니다. 세상에는 제가 쓸 수 없는 사용설명서만 가득하고요. 물론 우리는 성장과정에서 깨지고 구르며, 비록 누덕누덕해 보일지라도 자신만의 사용설명서를 만들어 나갑니다. 거기에는 '직장 동료와 (이상하게 보이지 않고) 가볍게 수다 떠는 법'이라든가 '(이상한 사람이 되지 않도록) 자리에 안 어울리는 말을 참는 법' 같은, 애틋한 항목이 담겨 있기도 해요.
당연하면서도 슬픈 이야기지만, 사용설명서의 항목이 적을수록 살기가 더 어려울 겁니다. 그래서 저는 제 사용설명서를 대공개(?)해서 참고 자료를 하나 만들고 싶어요. 전문가들이 추천하는 좋은 방법들은 이 사용설명서에 담긴 내용보다 훨씬 많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정말로 사용하고 있는 방법만 적으려고 합니다. 그래야 참고 자료로써의 가치가 있을 테니까요. "저 사람은 저렇게 사는구나" 정도로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글은 제 일상을 따라가는 형태로 쓰려고 해요. 목차를 먼저 짜려고 여러 날 고군분투했는데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요. 내용은 ADHD에 관련된 이야기가 주를 이루겠지만, 불안이나 양극성 장애, 성격, 트라우마, 환경에 관련된 글도 있습니다. 저의 문제들은 저 모든 면들이 얽히고설켜서 만들어낸 것이니까, 사용설명서도 ADHD에만 국한될 수는 없겠죠.
또한 이 사용설명서에 적은 내용을 제가 평생 똑같이 실천하면서 살지는 않을 겁니다. 일단 몇 년 전만 생각해 봐도 지금이랑은 사는 방식이 많이 달랐어요. 이 사용설명서는 2023년의 버전이며 앞으로 얼마든지 발전하거나 변화할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 주세요. 달리 말하자면, 이 글을 보시는 분들은 스스로에게 잘 맞고 더 유용한 사용설명서를 쓰실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