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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수 Mar 06. 2023

일어나는 게 부활만큼 어려워요

아침 5시 30분, 가짜 기상


 



알람을 듣게 되기까지


작년에 병원을 다니기 전까지는 아침 8시에 일어났습니다. 출근은 9시까지입니다. 8시에 일어나면 지각입니다. 어스름할 때 일어나야 지각을 하지 않는데, 침대에서 눈을 떠 보면 언제나 불길할 정도로 햇빛이 따스하더라고요. 네, 매일같이 회사에 지각하며 살았습니다(병원을 찾았을 때 해고되기 일보 직전이었습니다).


일찍 자도 늦게 자도 늦잠을 잤습니다. 어릴 때부터 아침잠이 너무 많았어요. 거기다가 오전에는 도무지 정신을 못 차렸기 때문에 어머니께서 많이 고생하셨고, 20대 때는 룸메이트들이 고생을 했습니다. 아침마다 타박을 듣거나 미안해 하는 게 일상이었어요. 게다가 이상하리만치 낮에 졸렸습니다. 학교를 다닐 땐 아침에 자서 점심시간에 일어나거나, 점심시간에 자서 종례 때 일어나는 일도 다반사였어요. 심지어는 공부 좀 하겠다고 교탁 앞자리를 차지하고서도 졸았어요. 


당연하게도 밤잠은 없었습니다. 심지어 일곱 살 때도 몰래 책을 보느라 새벽까지 깨어 있곤 했어요.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악순환이 평생 반복됐습니다. 성인이 되고서는 몇 년에 걸쳐 노력한 끝에 일찍 자는 데는 성공했지만, 놀랍게도 늦잠은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그냥 잠을 많이 자는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그렇지만 수면 시간이 늘어나니까 기분 문제가 많이 좋아졌습니다...) 


그런데 이 평생의 악순환이 뜻밖에도 3주만에 깨졌습니다. 약물치료 초반부터 ADHD 약인 메디키넷과 더불어 기분조절제인 아빌리파이를 같이 먹기 시작했는데, 둘 중 누구의 활약인지는 몰라도 '알람을 듣고 일어나는 것'이 가능해졌어요. 지각이 바로 멎었습니다. 직속 상사분께 "저 사실은 ADHD 진단을 받았는데요, 이제 지각 안 할 수 있습니다"라고 충동적으로 내뱉은 호언장담을 지킬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습니다. 




범인은 일주기리듬


수면장애는 ADHD를 가진 사람에게서 흔하게 보고됩니다. 사람의 수면과 각성은 약 24시간의 일정한 주기를 갖는데, 이를 일주기 리듬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몸 안에 생체시계를 갖고 있어요. 지구의 자전에 따른 환경의 변화에 맞춰 잠에 들기도 하고, 깨기도 하죠. 우리 몸의 모든 기관(장기와 피부까지도요!)이 각자의 생체시계를 갖고 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생체시계이자 대장격인 시계가 시상하부에 있는 '중추 생체시계'입니다. 이 시계는 빛을 신호로 작동합니다. 신호가 없더라도 항상성을 유지하는 것 또한 특징입니다. 새까만 방에 사람을 가둬놔도 얼마간은 평소에 하던 대로 잠들고 일어날 수 있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ADHD를 가진 성인 중 이 일주기리듬이 뒤로 밀려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해요한 연구에서는 75%가 그렇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늦게 잠들고 늦게 깨어나죠. 저는 양극성 장애 2형도 갖고 있는데, 이 양극성 장애에서도 일주기리듬의 이상이 관찰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말로 멋대로 자고 일어날 수는 없죠. 지각을 할지라도 어떻게든 등교나 출근 같은 사회적 시간에 맞춰 움직이기는 합니다. 그러다 보니 잠이 항상 모자랐어요. 수면 부족은 ADHD의 과잉 행동 증상이나 집중력 부족 증상을 더욱 악화시키며, 기분 장애에도 안 좋은 영향을 끼칩니다. 누구나 잠이 모자라면 집중력이 뚝 떨어지고, 짜증이 늘고, 충동적인 결정을 하게 되잖아요. 수면 부족이 음주와 비슷한 정도로 뇌의 기능을 떨어트린다는 이야기도 있어요. 맞는 말 같습니다. 잠을 못 잔 저는 취한 거랑 비슷한 상태가 돼요. 조금 신나기도 하고? 


아무튼 ADHD나 불안, 우울 같은 기분장애가 있는 경우 수면 부족은 더 큰 문제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잠은 정말로, 정말로 중요해요. 특히 수면이 충분하지 않으면 ADHD 약이나 항우울제, 기분조절제를 꾸준히 먹더라도 복약 전과 후의 변화를 정확히 파악하기가 힘듭니다.




일단 눈은 떴어요


다시 저의 아침으로 돌아올게요. 아침 5시 반에 알람이 울립니다. 미라클 모닝 같은 기상 시간이죠? 그런데요, 이 5시 반 기상은 가짜(!) 기상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하고 싶은 행동이 있다면,
그 힌트를 눈에 보이게 둡니다.


5시 반에 일어나면 일단 몸을 일으킵니다. 침대 바로 옆에 작은 테이블이 있습니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는 알람을 울리고 있는 핸드폰과 함께 물과 메디키넷, 운동복, 작은 과자가 놓여 있습니다. 제가 어젯밤에 늘어놓은 거예요. 그러면 일단 알람을 끄고, 냅다 약을 먹고, 운동복으로 갈아입습니다. 그리고 다시 잡니다(!). (과자는 이따 일어나서 먹을 거예요)


일어나자마자 ADHD 약을 먹는 건 다른 환우들도 많이 쓰는 꼼수예요. ADHD 약은 각성제라서 잠을 깨워 주는데, 저는 빈 속에 약을 먹으면 약효가 돌기까지 약 30분에서 1시간가량이 걸립니다. 아침에 정신을 차리기가 워낙 힘들다 보니, 진짜 일어나고 싶은 시간보다 일찍 일어나서 약만 먹고 다시 자는 거예요.


그리고 테이블에 놓인 물건들은 제가 '아침에 하고 싶은 행동'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운동복은 원래 서랍에 들어 있었는데, 아침에는 이성이 없기 때문에 '운동을 해야지' 같은 다짐도 깡그리 잊은 상태입니다. 서랍으로 운동복을 꺼내러 갈 정신도 없어요. 그래서 눈 뜨자마자 보이는 곳에 운동복을 둡니다. 일어났는데 옷이 눈에 띄니까 홀린 것처럼 옷부터 갈아입습니다. 이렇게 하면 '운동 가기 싫다'는 생각을 할 틈도 없이 운동할 준비가 되어 버려요. 새로운 습관을 만들 때는 이렇게 신호(Cue)를 눈에 띄는 곳에 두거나 기존에 하던 행동에 붙이면 실행 확률이 드라마틱하게 올라갑니다. 예를 들어 아침에 이미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시는 습관이 있고, 운동하는 습관을 새로 만들고자 한다면 운동복을 냉장고 옆에 둡니다. 그럼 물 먹으러 갔다가 난데없이 운동하게 되는 거죠.


과자는 아침 식사입니다. 오○바이트나 작은 에너지바 같은 걸 먹어요. 이렇게라도 아침을 먹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저는 딱 하나만 노립니다. 잠 깨는 거요. 음식을 씹는 저작운동을 하면 뇌가 활성화되면서 잠에서 깨는 데 도움이 돼요. 물론 과자가 아니라 다른 걸 준비할 때도 있는데, 되도록 탄수화물이 들어 있고 몇 번이라도 씹을 수 있는 고체식을 고릅니다. 잠을 자는 동안 떨어진 포도당을 채워서 뇌를 활성화시키려면 아침식사에 탄수화물이 들어 있는 게 좋거든요. 하지만 단순 탄수화물은 혈당을 높이기 때문에 복합 탄수화물이 들어 있다는 것들을 먹으려고 해요. 하지만 무엇을 준비하더라도 손을 뻗자마자, 냉장고를 열자마자 먹을 수 있게 미리 소분해 둡니다. 예를 들어 얼마 전까지는 견과류를 넣은 고구마 무스를 먹었는데요. 일요일에 왕창 만들어서 1주일치를 소분해 두고 냉장고 앞에 서서 우걱우걱 먹었습니다.


저는 잠에서 깼을 때의 저와, 제가 하려고 마음먹은 행동 사이에 있는 허들을 최대한 줄이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아침에 일어나서 모닝 페이지를 쓴다'를 목표로 삼았다고 해 볼게요.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 노트에 글을 쓰는 건 얼핏 간단히 할 수 있을 것처럼 들려요.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 사이에는 의외로 수많은 추가 행동들이 필요합니다. 일단 책상으로 가야 하고, 노트를 찾아서 펼쳐야 하고, 펜도 골라야 하죠. 그 행동들이 제게는 모두 다 장애물입니다. 장애물이 많을수록 그 행동을 하게 될 가능성은 뚝뚝 떨어집니다. 제가 모닝 페이지를 쓴다고 한다면 노트와 펜을 베개맡에 두겠어요. 그리고 눈을 뜨자마자 잡아서 침대 위에서 쓸 것 같습니다.(방은 좀 어수선해 보이겠지만요.)


5시 30분. 저는 눈을 뜨자마자 ADHD 약을 먹고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다음 다시 침대에 털썩 누웠습니다.

운동복은 미리 세탁해 둔 거예요. 깨끗해요. 안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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