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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tainsight Jan 10. 2024

누렁이와 꼬리꽃의 기막힌 동거

<친구의 전설>을 읽고

글.그림 이지은


수업을 위해 읽는 책들은 의무감이라는 재미없는 감정 때문에 아무 느낌 없이 책장을 넘기게 되는 경우가 많다. 표지도 대충, 제목도 대충. 그런데 이 책은 표지부터 범상치 않은 매력을 발산했다. 익살스러운 표정의 호랑이와 민들레, 두 녀석이 서로를 노려보고 있다. 이야기는 그 유명한 "옛날 옛날 한 옛날에, 성격 고약한 호랑이가 살았어..."로 시작한다.

숲 속의 꼴통, 호랑이는 어느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이다. 여기저기 어슬렁거리며 숲 속 친구들을 괴롭히기 일쑤고 녀석이 나타났다 하면 동물 친구들은 총총총 사라진다. "맛있는 거 주면 안 잡아먹지~"라는 시그니처 대사를 날리면 곰이 "너 또 말썽이냐곰!"라며 핀잔을 주고, 고양이는 무시하며 "그냥 가자옹~" 이런다. 호랑이가 이러는 이유는 외로워서이다. 괜히 오리 가족이랑 놀아보고 싶어서 육중한 몸을 날려 연못에 풍덩했다가 찬바람만 날린다.


그러던 어느 날 따끔한 통증과 함께 호랑이 꼬리에 민들레 한 송이가 달라붙게 된다. 이 민들레는 용감하기도 하지 호랑이를 보자마자 "누렁이, 넌 누구냐?"라고 따진다. 호랑이도 황당하긴 마찬가지. 자기 꼬리에 난데없이 붙은 이 꼬리꽃을 떼어내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떨어지지 않는다. 그 이상한 동거(?), 동행을 쿨하게 받아들인 건 민들레. 민들레는 만나는 이웃들에게 살갑게 인사를 건네질 않나 누렁이가 자기 몸에 붙었다며 푸념을 늘어놓고 여기저기 끌고 다니며 도움이 필요한 곳마다 호랑이를 출동시킨다. 호랑이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늘 해코지하고 삥 뜯고 훼방만 놓던 호랑이가 남들을 돕고 있다. 그런데 호랑이는 이 동행이 은근 맘에 든다. 민들레 덕에 이웃들의 빛과 말이 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날이 오고 만다. 민들레도 호랑이도 갑자기 하얗게 변한다. 누렁이는 백호가 되고 민들레의 노란 꽃잎은 하양 홀씨가 되어있다. 둘이 눈 안 감기 내기를 하다가 호랑이가 혼신의 힘을 다해 분 입김에 날려 민들레는 하늘로 날아가 별처럼 빛난다. 갑작스러운 이별에 황망한 호랑이에게 민들레는 친구들을 남겨주었다.


좋은 친구와의 만남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관계가 서툴고 투박한 사람에게 센스 있고 살가운 친구가 붙어준다면 그거야 말로 잭팟이다. 민들레는 호랑이에게 핀잔을 주며 원치도 않는 일들을 하게 만든다. 민들레는 절대 할 수 없는 일들이다. 냇가에 꼬마 친구들이 건너갈 수 있도록 꼬리를 내준다든지, 낭떠러지에 떨어진 달걀을 구해준다든지... 관계 맺음에는 자기 헌신과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을 민들레는 끌고 다니며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다.


읽는 내내 빵빵 터지며 웃다가 마지막에 눈물짓게 되는 그런 책이다. 미워할 수 없는 악동 호랑이와 쿨내 진동하는 시크녀 민들레의 볼을 마구 꼬집어주고 싶을 만큼 귀여워 미치겠다. 감각이 정말 탁월한 작가다. 볼로냐 라가치상 코믹-유아 그림책 부문 대상을 받았다는데 정말 그럴 만하다. 사람들 보는 눈은 다 같은가 보다. 이제 초등학교 입학하는 똘똘이 제자 녀석, 그림책 감별사인데 지난 1년 읽은 책 중 최고라며 볼 때마다 읽자고 조른다. 그림책이 공전의 히트를 치면 반드시 어린이 뮤지컬로 만들어지는데 얼마 전 배너를 보았다. 뮤지컬이 나왔다는.




나는 어려서 엄마 무릎에 앉아 그림책을 읽은 기억이 거의 없다. 엄마는 늘 바쁘셨고 내가 들은 이야기는 LP판이 들려주는 옛이야기가 전부였다. 엄마가 된 후 세상에 이렇게 멋진 그림책이 많다는 것을 알고는 내가 놓친 그림책들이 너무 아까웠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과 읽고 또 읽었고 정말 행복했다. 그리고 여전히 지금도 좋은 그림책을 알아볼 수 있어 감사하다. 나도 살짝 꿈을 꿔 본다. 어른과 아이가 함께 읽고 감동하는 동화를 써보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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