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 주택>을 읽고
글 유은실
출판사 비룡소
아이들 어릴 때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선생님의 책을 함께 많이 읽었다. 그 유명한 삐삐 시리즈, 명탐정 칼레, 산적의 딸 로냐, 사자왕 형제의 모험 등 제목만 열거하는데도 그때의 공기와 분위기가 느껴진다. 책 읽어주기는 의무감에 하는 숙제일 때도 많았다. 그런데 린드그렌의 책을 읽을 땐 나도 빠져들었다. 유은실 작가는 <나의 린드그렌 선생님>이라는 책으로 알게 되었다. 헌책방에서 제목이 반가워 얼른 주워 들었는데 주인공인 비읍이가 헌책방의 '그러게 언니'를 통해 린드그렌의 세계로 들어가 성장하는 이야기였다. 어쩜 그리 말맛이 좋은지. 유은실 작가는 읽는 내내 말의 쫄깃함을 느끼게 해주는 작가다. 이번엔 <순례 주택>을 만났다.
아이들에게 요약이 논술의 기본이라고 가르치면서 정작 꽤 두툼한 소설을 몇 줄로 요약하려니 쉽지 않다. 이런 경우 등장인물 소개가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순례 씨: 은퇴한 세신사. 때 밀어 번 돈으로 구옥을 사서 리모델링하고 순례주택이라 명명한다. 때탑이라고도 부르는 순례 주택에서 얼마 전 사망한 전남친의 외손녀 수림이를 키워줬다. 돈을 다 못쓰고 죽을까 봐 걱정. 통장 잔고가 1000만 원이 넘을까 봐 늘 999만 9999원 이하로 유지하며 잔고 털기를 한다. 유산은 국경 없는 의사회에 기증할 예정. 순례주택은 시세 따라 집세를 올리지 않아 번호표 받고 5년 이상 대기하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
수림: 순례 씨의 '최측근'. 이름도 거창한 원더 그랜디움 아파트에 거주하지만 거북 마을 빌라촌에 있는 순례 주택이 훨씬 편하다. 생물학적 가족을 1군이라 부르며 자신을 2군 후보 선수쯤 된다고 여긴다. 뭐가 부끄러운지 모르는 사람들과 가족으로 사는 건 부끄러운 일이라 생각한다.
아빠: 대학 시간 강사. 우리나라 최고 국립대를 나와 전임교수가 되기를 바라며 15년 간 시간 강사 생활 중이다. 집은 장인의 신축 아파트에 얹혀사는 걸로, 생활비는 부모형제에게 받아 쓰는 것으로 해결하고 있다.
엄마: 전업 주부. 아빠와 같은 대학에서 만났으니 자부심이 하늘을 찌른다. 빌라촌 아이들과 원더그랜디움 아이들이 섞이는 게 늘 못마땅. 갑질은 기본이고 순례 씨를 '때밀이 아줌마', '동거녀'라며 무시했지만 결국 순례 주택에 들어가 순례 씨에게 서서히 물들어 간다.
미림: 수림의 언니. 과일 깎을 줄도 모르고 라면 하나 자기 손으로 끓여 먹을 줄 모르는 고1. 전교 1등. 없는 살림에 학원비를 엄청 쓰고 있고 꿈이 '날마다 드라이클리닝 냄새가 가시지 않은 옷을 입고 BMW를 타고 출근하는 20대'가 되는 것이다.
수림이네 1군은 할아버지가 태양광 사기를 당해 진 빚 때문에 원더그랜디움에서 나오게 된다. 갈 곳 없어 불쌍해진 도도한 1군들은 순례 씨의 배려로 입주가 하늘의 별따기라는 순례주택에 입성한다. 그곳에서 여러 사고를 치다가 조금씩 변화가 일어난다. 이 책의 결말이 편안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문제적 인간들을 억지로 변화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아빠와 미림은 끝까지 밉상이다. 그러나 엄마에게는 아주 쪼끔 변화가 일어난다. 그리고 결혼 후 한 번도 부부싸움을 한 적 없는 이 부부는 처음으로 부부 싸움을 하는데 수림이는 이 낯선 불화가 눈물 나게 반갑다고 하며 소설은 끝이 난다.
순례 씨는 수림이에게 묻는다. "어떤 사람이 어른인지 아니?" 순례 씨는 '자기 힘으로 살아 보려고 애쓰는 사람'이라고 답한다. 그러면서 수림이 가족 중 어른은 수림이 밖에 없다고 말한다. 40대 중반이 넘도록 자기 가족의 생계를 부모형제에게 의지하고 그걸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은 어른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부분을 읽으며 나는 어른인가 질문했다. 상황은 좀 다르지만 우리 부부도 수림이네 1군처럼 살지 않았었나 돌아본 것이다. 우린 시부모님이 사주신 멋진 주상복합 아파트에서 살았었다. 우리 힘으로는 절대 장만할 수 없는 집이었다. 남편과 나는 처음에 정말 부담스러웠지만 어머니의 강권에 들어가 살았다. 그리고 주재원 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우리는 그 집에 돌아갈 수 없었다. 시아버님의 사업이 안 좋아지면서 우리 집의 전세 보증금까지 어머니가 융통해 쓰시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분은 자신이 사 준 집이므로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셨다. 우리에게도 그 집은 이름만 빌려드린 어머니의 집처럼 여겨졌다. 긴 이야기를 간단히 줄인다면 우린 어머니가 사주신 모든 것을 다 잃었다. 수림이네 1군처럼 우리 부부는 뻔뻔하진 않았지만 어른답게 처신하지 못했고 어머니의 강압적 배려를 못 이기는 척 받아들이며 독립적인 생활을 못했었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어른인가? 어른이 되려고 열심히 살고 있다.
순례 씨는 이름을 개명했다. 순하고 예의바르다는 뜻의 순례(順禮)에서 순례자에서 따온 순례(巡禮)로. 지구별을 여행하는 순례자의 마음으로 살고 싶어서라고 했다. 이름을 그렇게 바꾼 덕인지 순례 씨는 감사를 입에 달고 산다고 했다. 순례 씨가 좋아한다는 유명한 말이 마음을 때렸다.
"관광객은 요구하고, 순례자는 감사한다."
순례자는 최소한의 것으로 감사하고 만족하며 삶의 순간순간에 감사한다. 한걸음한걸음 걸어가는 순례 과정 자체를 의미 있게 여긴다. 하지만 관광객은 비용지불을 했으므로 마땅히 권리를 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늘 필요를 말하고 요구하면서... 나는 내 인생에 있어서 순례자인가 관광객인가? 수림이가 다짐한 것처럼 나도 순례자가 되고 싶다. 순례자가 되지 못하더라도 내 인생에 관광객은 절대 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우리의 어른되지 못함으로 인해 우리는 광야에 던져졌고 열심히 진짜 어른이 되기 위해 살아내고 있다. 광야에서는 관광객이 될 수 없다. 온몸으로 모래 바람을 맞으면서도 그곳에 있어야 하는 이유가 있는 사람들만 견딜 수 있는 곳이 광야다. 광야에서는 순례자만 살아남는다. 우리가 겪은 고난이 우리를 더 깊은 순례자, 진짜 어른으로 만들어주고 있다.
순례 씨는 국어 교과서를 계속 읽는다. 순례 씨가 수림이에게 자기 인생 같다면서 읽어준 시다. 떨어져도 쓰러지는 법 없이 튀어오르는 둥근 공처럼 살아가길~~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정현종
그래 살아봐야지
너도 나도 공이 되어
떨어져도 튀는 공이 되어
살아 봐야지
쓰러지는 법이 없는 둥근
공처럼, 탄력의 나라의
왕자처럼
가볍게 떠올라야지
곧 움직일 준비되어 있는 꼴
둥근 공이 되어
옳지 최선의 꼴
지금의 네 모습처럼
떨어져도 튀어 오르는 공
쓰러지는 법이 없는 공이 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