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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tainsight Feb 26. 2024

베고니아가 가르쳐준 것

종로 5가에서 약 사고 김밥 먹고 화분 산 이야기

막둥이 아들이 고3이 된다. 겨울 방학에도 학교 기숙사에 남아 공부를 했고 벌써 담임과 상담도 한 번 했다. 그러니 이미 고3이라고 해야겠다. 엄마, 아빠를 닮아 아들도 건강 체질이지만 잠을 제대로 못 자니 영양제 외에 추가로 먹여야 할 것들을 좀 사러 종로 5가 약국 타운에 오랜만에 갔다. 앰플 형태로 된 어쩌구저쩌구와 이름도 외우기 어려운 영양제를 사들고 종로 5가에 오면 반드시 가야 하는 광장 시장에 갔다. 모녀 김밥! 마약 김밥이라고 하는 그 김밥이다. 반드시 '모녀 김밥'에서 사 먹어야 한다. 무슨 맛이냐면~~ 미원맛이다. 볶은 당근과 단무지만 들었는데 그렇게 맛있다면 미원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래도 맛있으니 완전 용서한다. 마약 김밥과 빈대떡을 사들고 간 곳은 종로 5가 꽃시장. 아직 추워서 구경하는 재미는 없겠지 하면서도 그냥 집에 가긴 아쉬워 발걸음을 옮겼다. 비어있는 화분 몇 개에 심을 만한 아이들을 만나면 좋겠다 하며 구경을 하는데 역시 다육이들과 난 화분만 잔뜩 있고 눈에 들어오는 아이들이 없었다.


몇 바퀴를 돌다가 아이비 화분 몇 개와 나에게 여러 번의 낭패감을 안겨주었던 트리안을 샀다(이번엔 반드시 장수하자!). 그리고 돌아서려는데 화사하게 웃고 있는 베고니아가 보였다. 살구색에 선홍색 테두리를 갖고 있는 베고니아가 너무 예쁜 거다. 나는 원래 꽃보다는 이파리를 좋아한다. 꽃이 시드는 걸 보는 게 싫어서다. 항상 변함없거나 무럭무럭 자라는 모습만 보고 싶은 거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날은 꽃을, 베고니아를 샀다. 


돌아오는 길에 내가 꽃을 들이지 않는 까닭을 생각해 보았다. 꽃은 아름답지만 지고 나면 슬프다. 그 빈자리가 안타까워 우리 거실엔 늘 한결같은 이런저런 모양의 초록이들만 가득하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꽃이 떨어지고 남은 초라한 화분을 마주할 용기가 내게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 그런데 아름다운 꽃을 보면서 꽃이 떨어질 일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이 참 한심하다. 꽃은 꽃대로 보면서 감탄하고 진 자리를 보면 잘 치워주면 그만이다. 인생도 희로애락이 있지 않은가. 나는 로와 애가 무서워 희와 락도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바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애매한 자리에서 안전하게 나를 지키겠다고 하나님과 사투를 벌이며 살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보게 되었다.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면서 먼 미래를 고민하고 걱정하는 내 모습이 그대로 담겨있다. 


베고니아 화분 하나 사고는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그런데 꽤 짧고 굵은 성찰이었다. 그리고 내가 아직도 조금씩 성장하고 있는 느낌이라 기분이 좋아졌다. 이파리만 고집하다 꽃을 샀다. 내가. 피었다가 져도 괜찮아진 것이다. 안달하고 이거 아니면 큰 일 날 것 같고 그랬었다. 그런데 놓칠까 봐 발발 떨며 붙들고 있는 것들을 하나 둘 놓을 줄도 알게 되고 놓아도 살아지는 걸 경험하고 있다. 이런 나의 변화를 보며 기뻐하실 분이 계시다. 하늘에.


'아이고... 그거 다 늙어서 그래. 할머니들 카톡 프로필 봐라. 다 꽃밭이지. 너도 늙어서 그래!'라고 산통깨는 누군가도 있을 것 같다. 뭐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내 맘의 작은 변화를 나는 그렇게 해석하고 싶지 않았다. 늙어서가 아니라 성장해서라고. 날 좀  따뜻해지면 꽃시장에 한번 더 가서 시클라멘을 종류별로 사 와야겠다.




너무 오랜만에 브런치에 글을 씁니다. 매일 큐티를 하며 글 쓰는 일을 반복하고는 있지만 브런치는 뭔가 각 잡고 써야 할 것 같아 늘 망설이게 되네요. 공부한다는 핑계로 자체 휴가를 쓰고 있었는데, 브런치에서도 발행 독촉을 받고, 아들도 글 좀 쓰라고 채근을 해서 주말 단상을 올려봤어요. 아들이 고3이라는 이야기로 시작해서 결국 제가 성장하고 있다는 이야기로 마무리했네요. 

아들~~ 올 한 해 이파리 말고 아름다운 꽃 피우고 풍성한 열매 맺는 한 해 되길 기도하고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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