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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기: 바둑에서 배우는 인생의 한 수

by 정영기

돌을 모두 치우고 바둑판을 정리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 게임이 있다. 바둑이다. 흑과 백의 치열한 접전 끝에 승부가 갈리고 나면, 두 대국자는 다시 첫 수부터 돌을 놓아가며 대국을 재현한다. 가끔은 미소를 짓고, 때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진지한 표정으로 서로의 생각을 나눈다. "여기서 이렇게 두었다면 어땠을까?" "이 한 수가 승부처였군요." "여기서 실수했네요." 이것이 바로 '복기(復棋)'다. 승부의 열기가 남아있는 바둑판 위에서 승자와 패자가 함께 걸어가는 이 특별한 여정은 다른 어떤 경쟁 스포츠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장면이다.


승자와 패자가 함께 걷는 길


2002년 LG배 결승, 이창호와 중국의 창하오가 대국을 마쳤다. 당시 세계 최강자로 불리던 이창호는 아쉽게 패배했다. 대국이 끝난 후, 두 기사는 자연스럽게 복기를 시작했다. 이창호는 자신의 패인을 차분히 분석했고, 창하오의 예리한 수를 칭찬했다. 패배의 쓴맛을 삼킨 지 채 몇 분도 지나지 않았지만, 그의 표정에는 원망이나 실망보다는 배움에 대한 갈증이 더 컸다.


"여기서 이렇게 물렸다면 어땠을까요?" 이창호가 물었다.


창하오는 잠시 생각에 잠긴 후 답했다. "그럼 저는 여기에 두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래도 선생님이 충분히 승산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이 짧은 대화 속에는 승자의 겸손함과 패자의 열린 마음이 공존한다. 바둑에서 복기는 단순한 예의가 아니라, 함께 성장하기 위한 고귀한 의식이다.


조훈현의 '패국연구(敗局硏究)'


'바둑 황제' 조훈현은 그의 자서전에서 특별한 단어를 언급했다. '패국연구(敗局硏究)', 패배한 대국을 연구하는 것이다. 그는 승리보다 패배에서 더 많은 것을 배웠다고 고백한다.


1980년대, 일본의 오타케 히데오와의 대국에서 패배한 후, 조훈현은 밤을 새워가며 자신의 실수를 분석했다. 그는 바둑판 앞에 홀로 앉아 수백, 수천 번 자신과의 복기를 반복했다. "왜 그 수를 두었을까?" "어디서 판세가 기울었나?" 그의 머릿속은 끊임없는 질문으로 가득 찼다.


몇 달 후, 두 사람은 다시 대국을 벌였고, 이번에는 조훈현이 승리했다. 대국 후 오타케가 물었다.


"지난번 대국 이후로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저 자신과의 복기였습니다." 조훈현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이창호의 '신산(神算)'과 복기의 힘


'돌부처' 이창호는 '신산(神算)', 신의 계산력으로 유명했다. 그의 정확한 계산과 판단은 하늘이 내린 재능이라고 여겨졌지만, 사실 그 뒤에는 끊임없는 복기의 노력이 있었다.


한 인터뷰에서 이창호는 이렇게 말했다. "어릴 때부터 매일 밤 그날 둔 바둑을 모두 머릿속으로 복기했습니다. 때로는 꿈속에서도 복기를 했죠."


승리한 대국이든 패배한 대국이든, 그는 항상 복기를 통해 자신의 바둑을 되돌아보았다. 상대의 관점에서, 때로는 제삼자의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판세를 분석하는 습관이 그를 세계 최강자로 만들었다.


"복기는 단순히 과거를 되돌아보는 것이 아닙니다. 미래를 위한 준비입니다." 그는 후학들에게 이렇게 조언했다.


바둑판을 넘어, 인생의 복기


복기의 정신은 바둑판을 넘어 우리 삶 전반에 귀중한 교훈을 준다.


박세리는 1998년 US여자오픈에서 맨발로 물에 들어가 기적적인 샷을 성공시켜 우승했다. 경기가 끝난 후, 그녀는 코치와 함께 라운드 전체를 '복기'했다. 어떤 선택이 좋았고, 어떤 결정이 아쉬웠는지를 분석했다. 이 과정은 다음 대회를 위한 중요한 준비가 되었다.


기업가 스티브 잡스는 실패한 프로젝트마다 '복기 세션'을 가졌다. 애플의 실패작인 '리사' 컴퓨터 출시 후, 그는 팀원들과 함께 실패의 원인을 철저히 분석했다. 이 경험은 후에 매킨토시의 성공으로 이어졌다.


작가 J.K. 롤링은 '해리 포터' 시리즈의 각 책이 출간된 후, 스스로 작품을 다시 읽으며 '문학적 복기'를 했다. 그녀는 이 과정에서 다음 작품의 영감을 얻었다고 고백한다.


일상의 복기, 성장의 비결


우리 일상에서도 복기의 시간은 값진 성장의 기회가 된다.


직장에서 중요한 프로젝트를 마친 후, 팀원들과 함께 무엇이 잘 됐고 무엇이 부족했는지 솔직하게 나누는 시간은 단순한 평가가 아니라 집단 지성의 복기다.


부부가 갈등 후에 차분히 앉아 서로의 감정과 생각을 나누는 대화는 관계의 복기다.


하루를 마치며 침대에 누워 오늘 하루를 되돌아보는 짧은 성찰의 시간은 개인적 복기다.


패배에서 피워 올리는 지혜의 꽃


조훈현과 이창호가 수많은 패배 속에서도 세계 최강자로 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복기에 있었다. 그들은 승리보다 패배에서 더 많은 것을 배웠다. 복기는 패배의 쓴맛을 지혜의 단맛으로 바꾸는 연금술이었다.


인생에서도 마찬가지다. 실패와 패배는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중요한 것은 그 패배를 어떻게 대하느냐다. 회피하고 원망하기보다는, 차분히 앉아 자신의 선택과 행동을 복기해 보는 용기가 필요하다.


작가 새뮤얼 베케트는 이렇게 말했다. "실패해 보라. 다시 실패해 보라. 더 잘 실패해 보라." 이는 복기의 정신을 담은 명언이다. 매번의 실패가 더 나은 실패로, 결국에는 성공으로 이어지는 여정이 바로 복기의 길이다.


함께 걷는 복기의 길


바둑에서 복기는 두 대국자가 함께 걷는 여정이다. 승자와 패자의 구분이 잠시 흐려지고, 두 사람은 진리를 향해 함께 나아간다. 이 과정에서 승자는 겸손함을, 패자는 배움의 기회를 얻는다.


인생이라는 큰 바둑판 위에서, 우리 모두는 때로는 승자로, 때로는 패자로 살아간다. 중요한 것은 매 순간을 복기의 자세로 대하는 것이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그 속에서 다음 한 수를 위한 지혜를 찾아내는 것. 그것이 바로 바둑의 복기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인생의 한 수다.


조훈현과 이창호, 두 바둑의 대가가 평생 지켜온 복기의 정신을 우리도 삶 속에서 실천해 보자. 오늘의 패배가 내일의 승리를 위한 소중한 밑거름이 될 수 있도록, 매일 밤 자신만의 복기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바둑판 위의 흑과 백처럼, 우리 인생도 승리와 패배, 기쁨과 슬픔이 교차한다. 그 모든 순간을 복기의 지혜로 엮어간다면, 우리 각자의 바둑 인생은 더욱 풍요롭고 깊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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