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해튼의 번화한 33번가.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이곳 지하에 세계에서 가장 많은 금이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바로 뉴욕 연방준비은행(Federal Reserve Bank of New York) 지하 금고 이야기다.
1924년, 뉴욕 연방준비은행은 맨해튼의 단단한 암반층을 파고 들어가 거대한 금고를 건설했다. 지하 80피트(약 24미터) 깊이, 해수면보다 50피트(약 15미터) 아래에 위치한 이 금고는 마치 요새처럼 견고하다.
90톤에 달하는 원통형 강철문은 4명의 직원이 각자의 비밀번호를 입력해야만 열린다. 문이 닫히면 공기와 물도 통과할 수 없는 완벽한 밀폐 상태가 된다.
이곳에는 약 50만 개의 금괴, 총 6,190톤의 금이 보관되어 있다. 시가로 환산하면 3,500억 달러(약 460조 원)가 넘는 어마어마한 규모다. 전 세계 공식 금 보유량의 약 25%가 이곳에 있다.
놀라운 점은 이 금의 98%가 미국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전 세계 60여 개국의 중앙은행과 국제기구들이 이곳에 금을 맡겨두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많은 국가들이 전쟁의 위험에서 금을 보호하기 위해 가장 안전한 곳으로 뉴욕을 선택했다.
금괴로 이루어진 미로
금고 내부는 122개의 방으로 나뉘어 있다. 각 방에는 특정 국가나 기관의 금이 보관된다. 금괴 하나의 무게는 약 12.4kg이며, 순도는 99.5% 이상이다.
흥미로운 것은 국가 간 금 거래 방식이다. A국이 B국에 금을 지불해야 할 때, 실제로 금을 운반하지 않는다. 대신 직원들이 A국의 방에서 금괴를 꺼내 B국의 방으로 옮기는 것으로 거래가 완료된다. 이 단순한 '방 이동'으로 수십억 달러의 거래가 이루어진다.
이곳의 보안은 상상을 초월한다. 무장한 경비원들이 24시간 순찰하며, 최첨단 감시 시스템이 작동한다. 금고로 통하는 유일한 엘리베이터는 평상시에는 금고 층에 멈추지도 않는다.
심지어 금고 직원들도 자신이 담당하는 구역 외에는 접근할 수 없다. 금괴 하나하나에는 고유 번호가 새겨져 있어 철저히 관리된다. 지금까지 단 한 개의 금괴도 분실된 적이 없다.
암호화폐와 디지털 자산이 각광받는 시대에도 이 오래된 금고는 여전히 건재하다. 오히려 경제 위기 때마다 '안전자산'으로서 금의 가치는 더욱 빛을 발한다.
연준은 일반인을 위한 금고 투어도 운영한다. 물론 보안상의 이유로 제한적이지만, 세계 경제의 심장부를 직접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다.
다음에 맨해튼 33번가를 지날 때,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상상해 보자. 내 발아래 80피트 지하에서는 세계 각국의 금괴들이 조용히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위에서 뉴욕의 일상은 아무 일 없다는 듯 계속된다는 것을.
이 거대한 금고는 단순한 저장소가 아니다. 국가 간 신뢰의 상징이자, 세계 경제 질서의 한 축이다. 디지털 시대에도 이 아날로그적 신뢰 시스템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다.